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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누리다‘삶의 기쁨을 회복하다’ 7(빌립보서 4:11-12)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4.02 09:07
▲ 성공과 실패로부터 자유는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완성된다. ⓒGetty Image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삶의 기쁨을 회복하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자유를 누리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주 안에 굳게 설 것을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 굳게 서려면, 바쁘게만 살 게 아니라 주님 때문에 멈춰 설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일하는 데만 온통 주의를 다 빼앗길 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식의 빛을 밝혀 우리가 무슨 마음을 먹고 사는지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부어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완고하고 완악한 우리 마음에 임하셔서 우리 마음을 주님의 평강으로 다스리시도록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후회되는 일, 실패했던 일, 채 가시지 않은 아픈 기억을 곱씹는 것보다 주님을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주님이 지나온 우리 삶에 이미 함께하셨고, 이미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 과거를 되뇌이기보다 과거에 드러났던 주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금 재현되길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대해 염려하거나 혹시 일어날지 모를 두려운 상황을 자꾸 떠올리는 것보다 주님을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주님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고 완성시켜 주실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명확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기보다 다시 오실 주님의 역사를 신뢰하며 지금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게 낫습니다.

바울의 고백 그대로, 우리가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을 초월한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오래된 마음의 성향과 생각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 보시기에 참된 것, 경건한 것, 바른 것, 정결한 것, 사랑 받을 만한 것, 칭찬 받을 만한 것, 덕 있는 것, 기릴 만한 것에 우리의 생각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굳은 마음에 매인 채로는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고, 오래된 생각에 붙잡힌 채로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평강이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닫힌 우리 마음을 개방해 줍니다. 이것은 마치 낯선 곳에 홀로 있게 된 아이가 겁에 질려서 표정도 굳고 경직된 채 꼼짝도 못하다가 엄마가 나타나자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품으로 잽싸게 달려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대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 하느라 경직되고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를 홀로 두는 법이 없으신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강은 우리의 생각을 바른 이해와 사고와 분별의 길로 이끕니다. 우리의 생각이 고집스러워지고 편협해지는 때를 돌아보십시오.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두려워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일을 추진하면서 ‘이번에 이 일, 반드시 성공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건, 반드시 성공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한 이후의 상황을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비록 우리의 계획과 노력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되어 주시고, 우리 삶에 반전을 허락하신다’는 확신이 든다면, ‘이번에 이 일, 반드시 성공해야 해.’라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도 이 일, 기쁘고 감사하게 최선을 다해야지.’라고 생각할 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평강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사실 믿을 게 못 됩니다. 그것은 오염되기 쉽고, 딱딱하게 굳어 있을 때가 많으며, 많은 경우 왜곡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건 마음과 생각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우리의 본질적 자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인식하고 찬양하도록 우리를 추동하고 실제로 그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영적 본성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본질적 자기는 마음과 생각에 있는 게 아니라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오염되었다고 해서, 그게 왜곡된 채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고 해서,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부여하신 영은 사실 오염되는 법이 없습니다. 왜곡되는 법도 없습니다. 상하거나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간과되고 지나쳐질 뿐입니다. 많은 경우 잊혀지고 망각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영적 본성이 제 기능을 다하는 한, 우리는 언제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기다리고 기대하는 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성령과 접속되는 한, 우리의 작은 마음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양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계속해서 성령의 불꽃에 점화되는 한, 우리의 생각의 방향은 진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과 생각 너머의 영적 차원을 의식하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뢰하는 일을 습관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실 이것이 곧 기도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쓸 데 없는 일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내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마음을 쓰고, 생각을 골똘히 하는 일에는 열심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이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중하며, 훨씬 더 결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많이 쓴다고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건 아닙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좋은 생각이 절로 나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마음을 쓰고 생각을 골똘히 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오히려 마음 졸이는 일들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골치 아픈 문제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게 만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적으로 평안해질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내적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사실 신앙의 성숙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 중 하나는 내적 자유입니다. 바울도 이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7장 22절에서,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 칭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비록 노예의 신분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자유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바울에게 자유는 정치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내적 자유입니다. 우리는 정치사회적 자유만으로는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적 자유가 필요합니다.

내적 자유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에게 자유는 우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뜻합니다. 표면적으로 이 자유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행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일치되어 살려는 내 노력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은혜가 나를 구원하신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이 자유는 주님의 이끄심을 인정하면서 더 이상 내 노력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면서 더 이상 나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내적 자유인 죄로부터의 자유를 보면 앞서 말한 자유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는 로마서 8장 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신학적 논리 전개를 회상해 봅시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은 죄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죄로부터 건져낼 수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몸을 취하신 주님은 능히 우리를 이 죄로부터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자신을 의롭게 만들려는 의지와 노력에서 오는 자유가 아니라 의로우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에서 오는 자유입니다.

바울에게 자유는 또한 옛 사람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는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선언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매인 옛 사람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죄라는 프레임을 통해 볼 필요도, 정의내릴 필요도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오는 자유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성령을 통해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오는 자유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내적 자유를 진실로 온전히 누리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죄에 매여 있는 옛 사람의 전형적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약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만물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듬어 찾고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을 주셨지만, 사람은 어리석게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을 우상화하고 그것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그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고, 사람은 그 마음의 정욕에 따라 갖가지 불의와 죄악을 서로에게 행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묘사하는 죄에 매인 옛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매인 옛 사람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우리 마음의 우상, 우리 마음의 정욕으로부터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 자유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바울은 4장 10절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고마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베푼 호의와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감옥에서 혹시 몸이라도 상하지 않을까 싶어 에바브로디도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그의 편에 바울이 필요로할 만한 물건과 돈도 함께 보냈습니다(빌 4:16, 18). 바울은 그 일을 언급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고마워한 것은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였지, 물질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선물과 물질적 후원을 기쁨으로 받은 것은 그가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문 11절에서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표명합니다. 12절에서는 자신이 오히려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상태임을 강조합니다. 자신이 물질적 형편으로부터 초연해졌음을 힘주어 말합니다.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삶, 물질적 형편으로부터 초연한 삶,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일까요? 바울의 말을 다시 주목해 봅시다. 그는 11절에서 자신이 어떠한 형편에서든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사실 결핍에 대한 강한 선택적 주의 집중에서 비롯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나에겐 참 없는 게 많다고 생각하고, 그 없는 것들을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인 양 과장하며, 그 없는 것들 때문에 내 삶에 심각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두려워하면, 그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면, 곧 이미 갖추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그것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며 향유할 줄 알면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족하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족은 내 결단과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그래서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말한 것입니다. 또한 19절에서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확언합니다. 자족은 심리적 자위가 아닙니다. 자족은 나를 넘어 계신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내시는 부요한 은혜를 내가 알아차리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자유도, 초연함도, 자족함도 모두 하나님께 대한 확신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모두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그분의 평안을 누리고 그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데서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나 조건이 남과 비교해 볼 때 빈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의 현재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만날 기회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편하고 힘든 일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 자꾸 꼬이는 일들을 의연하게 허용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상황을 피하거나 외면한다고 그 상황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마음 쓰고, 걱정과 염려로 그 상황에 대한 생각을 채운다고 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악한 조건과 상황을 바꾸는 데만 힘쓸 게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그 모든 조건과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초연해지는 데도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삶의 만족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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