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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발하는’ 기독교와 ‘빛이 바랜’ 기독교양재섭의 타원형 평화 에세이 (4)
양재섭(평화수필가) | 승인 2024.04.03 00:58
▲ 어느샌가 한국 사회 민심의 바로미터가 된 광화문 광장에서의 한 집회 ⓒ연합뉴스

언제부턴가 광화문 광장은 민심의 흐름을 가늠케 하는 풍향계 노릇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에 다양한 계층이 모일 수 있다. 그렇다지만 때에 따라서는 보편적 사고방식의 범위를 벗어난 극단적 행태가 표출되기도 하고 또 통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목격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은 우리 사회에 깨우침의 기회를 주면서 아주 훌륭한 공부방 노릇을 하는 셈이다. ‘촛불혁명’ 이후에는 우리만의 문화를 벗어나 지구촌 사람들의 의식의 방향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양한 광화문 풍경 중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또 국민으로서 엄청난 혼란에 빠지는 느낌이 든다. 한국-미국-이스라엘 세 나라의 국기들이 함께 휘날리는 이 낯선 조합은 종교적으로 결국 기독교와 유대교의 견고한 연합을 의미할 것이다. 대체로 여기에 모인 군중들은 복음주의적 입장을 자부하는 기독교인들이고 일부에서 극우적이라는 저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아무튼 종교적으로 기독교인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와 미국교회가 기독교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주체세력은 유대교인이다. 유대교인이 아니면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 세력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최근 이스라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2023.10.7.)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반년 가까이 되었는데 3만 2천 명 정도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여성이 다수 포함된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끔찍한 결과와 가자지구의 참담한 모습만 시시각각 전해질뿐 전쟁 끝맺음에 대한 희망 섞인 이야기는 깜깜무소식이다.

비록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이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며 맞붙은 전쟁이지만 이스라엘의 탄탄한 재력이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제관계의 우월성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레위기 24:20)”는 등가성 원칙조차 무너진 상태에서 과잉 복수의 금지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구촌의 들끓는 여론을 바탕으로 유엔과 미국이 손을 써 보려고 조금은 노력하지만 이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훈수도 전혀 씨가 먹히지 않고 마지막으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처분만 기다릴 뿐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의 핵심적 본질로 상징되는 ‘유대교’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앞세우는 ‘기독교’는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기독교가 ‘기독(基督)’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과정은 대체로 그리스어인 ‘크리스토스’가 중국에서 한자음으로 변환되고 이것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기독, 기독교, 그리스도’로 통용되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기독교인으로 성장한 필자 자신도 ‘기독’이라는 단어의 뜻에 별 관심 없이 무의식적으로 지내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면,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오늘날 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의 삶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 이름하고 이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의문이 생긴다. 공통점과 차이점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선 믿고 따르는 경전의 측면에서 기독교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사용하는 반면 유대교는 구약성서(타나크)만 경전으로 인정한다. 구약은 두 종교가 모두 함께 사용하고 신약은 기독교만 수용하는 반면 유대교는 신약을 거부한다는 이야기이다. 유대교가 메시아를 기다리기는 하지만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는 아니라고 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대교의 의식으로는 결코 수긍할 수 없다.

형식논리상 같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맹렬히 공격하고 전복시킨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상황을 미국 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1967년 신앙고백서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참 인간성(true humanity)은 결정적인 한 번으로 실현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인 예수는 그의 동족 가운데 사셨고 그들의 가난과 시험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당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행위로 나타내셨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막무가내 폭력을 행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행위로 나타낸” 예수의 저항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교훈으로 이 시대에 부활 되고 있다.

결국 역사적으로 유대의 종교권력은 로마의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예수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빌라도의 사법적 절차를 가장하여 예수를 골고다의 처형장으로 내몰았다. 순교자 주기철은 찬송가 158장 2절에 “간악하다 유대인들 포악하다 로마 병정”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예수를 인정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죄의 대가로 국권을 상실하고 수 천 년 동안 세계를 떠돌며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평화 나라의 비전(이사야 11:6-9, 2:4)을 내팽개치고 극단적 평화 파괴의 선봉장이 된 이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깃발을 나부끼며 환호하는 모습은 형용모순도 이런 형용모순이 없다. 광화문으로 뛰쳐나온 이 ‘수상한’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어떤 기독교인들인가? 탐욕적 종교 선동가들의 정치 놀음 춤사위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것일까? 어디서부터 이런 세속적 혼합주의가 태생되었을까?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알맹이가 홀라당 빠져버린 ‘빛바랜 기독교’를 벗어나서 하나님나라의 생명과 평화로 속이 꽉 찬 ‘빛나는 기독교’로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양재섭(평화수필가)  peace-essayist@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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