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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고백, 제자들의 고백주님과 나는 쌍둥이(요한복음 20:24-29)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4.04.07 01:54
▲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제자들의 고백과 도마의 고백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Getty Images

1.

할렐루야! 함께 인사 나눕시다.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오늘 기쁜 부활절을 맞아 예배의 자리로 모일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지난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지냈습니다. 이제 부활절을 지내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며 지내게 됩니다. 사순절이 고난과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부활절은 해방과 기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순절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전의 모든 삶이 용서되고 구원을 얻었음을 깨닫는 절기라면, 부활절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게 될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절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순절은 과거를 돌아보는 과거지향적인 절기이지만 부활절은 미래를 내다보는 미래지향적인 절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며 우리의 미래의 삶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지 이야기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2.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특별한 사람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고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삶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고 몇 세기에 걸쳐서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질문에 답을 내놓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노력의 중심에 바로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대답과 설명이 있었지만 두 가지 가장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설명 드려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또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편에는 예수를 오로지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보낸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힘썼던 선지자들 중 가장 뛰어난 분, 최고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우 훌륭한 사람인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자.”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예수님은 완전히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잠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눈에 인간으로 보일 뿐, 인간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님을 신으로 믿고 숭배하자.”

예수를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위대함과 유일성에 더 집중했습니다. 전통 위에서 예수를 받아들였죠. 그래서 “예수도 훌륭하지만 진짜 신은 하나님 한분이지. 예수는 감히 주님과 똑같을 수는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신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은, 전통보다는 새로움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기적, 복음을 보고 듣고서 “와! 바로 이런 분이 신이지!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두 가지 주장이 너무나 치열합니다. 그리고 둘 다 너무나 그럴듯합니다. 선뜻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고 판단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예수님은 신인가 인간인가? 그 긴긴 고민 끝에 결국에 깨닫게 됩니다. <예수는 참으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참으로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인간인 <예수>와 신이신 <그리스도>가 한 분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신학적인 규정입니다. 인간 예수가 바로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존재의 차원 자체가 달라서, 결코 하나로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거나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차원과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차원이 결코 하나로 융합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인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가르침 속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한 삶 속에서, 그 삶에 부활로 개입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신과 인간의 온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이 인간이 된 사건, 성육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과 인간은 결코 하나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하나라는 통찰, 요한복음은 바로 그 통찰을 요한복음 1장의 성육신에 대한 고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일반적으로 도마의 불신앙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마침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고 말해주지만, 도마는 펄펄 뛰면서 믿지 않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유명한 말씀이 있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그런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십니다. 그리고는 ‘자 네 손가락 한번 옆구리에 넣어 봐라’ 하십니다. 도마는 그제서야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보고서야 겨우 믿은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못하고 교만을 부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거꾸러지는 사람, 믿음이 적은 사람의 표본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하면 안 된다’ 하는, 전형적인 불신앙의 모습으로 말해집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이 구절에다가 ‘도마의 불신앙’ 이라고 제목을 달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도마에게서 참 신앙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손과 그의 옆구리를 목격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남아있는 손과 옆구리의 상처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던 바로 그 예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그들의 앞에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손과 옆구리의 상처는 인간 예수의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인간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믿기지 않는 기적을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부활하신 예수가 참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도마에게 증거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퀴리오스를 보았소. 물론 ‘주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퀴리오스(kurios)는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요한복음에서는 ‘선생님’의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의 주인,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서의 선생님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제자들은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에요. 다만 과거에 자신들이 알던 인간 예수 선생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만 놀라워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도마에게 지금 ‘우리는 우리 선생님을 봤어! 우리 선생님이 다시 살아났더라니까!’ 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와 같이 다니셨던 그 인간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믿지 못합니다. 아니 안 믿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봐야지. 그걸 어떻게 믿어?’ 하는 겁니다.

4.

그런데 드디어 도마도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이제 예수를 만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해요. 여기까지의 도마는 불신앙의 도마가 맞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어땠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만나고나서 어떻게 됐느냐 겠지요.

우리 삶에도, 우리 신앙에도 그게 중요합니다. ‘예수를 만나기도 전부터 예수를 잘 믿고 그럴듯하게 멋지게 선하게 훌륭하게 잘 살았다.’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칭찬받을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구원에 합당하다!’ 하고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를 만난 뒤에 진짜로 예수를 믿고 예수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되느냐가 진짜 문제입니다.

부자청년을 떠올려 봅시다. 그사람은 예수를 만나기 전부터 착실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서는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그런데 마귀들린 사람, 예수를 전혀 모르던 사람,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 그런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주님으로 고백할 때 예수님은 오히려 ‘네가 구원받았다’ 하십니다.

누가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를 만나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되어야 합니다.

5.

다시 도마 이야기로 돌아오면, 예수님은 도마에게 ‘내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이제 도마는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도마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제자들처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Θεος)’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제자들하고 전혀 다릅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생님(kurios)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전에 만났던 그 선생님, 그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Θεος)’이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적인 증거 앞에서 신적 존재를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었던 인간 예수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이분은 인간 예수가 아니라 동시에 신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고의 틀 안에 갇혀있던 그의 영이, 부활의 신비를 목격하고 나자, 인간과 신이 하나 되었다는 통찰로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의 신앙과 도마의 불신앙이라는 패러다임이 깨어지고, 제자들의 불신앙과 도마의 신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도마야말로 예수님이 부활로서 증거하려고 했던 사실을 깨달은 유일한 제자 아닐까요?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은, 도마를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된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본 도마, 네가 진짜 복이있다.’ 이런 말씀은 아닐까요?

6.

요한복음 8장 2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19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곧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요한복음 자체에 그 대답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곳곳에서 ‘나는 무엇이다(εγω ειμι)’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느냐? 나는 이 모든 것이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그 모든 것과 동일하다. 그 모든 것과 하나이다. 그 모든 것과 하나 된 하나님이다.” 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공격적으로 선언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무슨 말씀인가 하니, ‘인간 예수와 신인 하나님이 하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서 인간과 신이 하나 되었다>는 사실이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육신이 부활을 통해 다시 하나님이 되는 이야기’로 끝맺는 것입니다. 말씀과 육신이 하나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인간 예수와 부활한 예수가 하나라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요 신은 신이다. 신과 인간은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존재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식의, 구별과 차별의 인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은총의 사건 안에서 감히 황송하게도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기쁨의 고백을 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둘이라고 생각하고 구별하고 구분하고 나누어 놓았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너희와 너희가, 우리 모두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보며 그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을 고백하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어 있는 삶을, 모든 이들과 하나 된 삶을, 그런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도마의 참 신앙인 것입니다.

7.

도마를 일러 쌍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쌍둥이가 뭡니까? 두 명이지만 사실은 한 명 같은 존재 아닙니까? 도마가 쌍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둘이지만 사실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입니다.

우리에게는 쌍둥이 같은 마음이 존재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지극한 믿음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적인 인식의 한계에 갇혀서 회의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이 두 마음의 갈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노력할 때 고난이 찾아오고 시험에 들게 됩니다. 두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을 용납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이 두 마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파괴되지 않습니다. 망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쌍둥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쌍둥이 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쌍둥이입니다. 하나님이신 말씀이 인간인 육신이 되셨듯이, 인간 예수가 부활을 통해 동시에 하나님 예수가 되셨듯이, 부족한 우리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게 됩니다. 나와 하나 되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시는 그런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살게 됩니다.

도마는 그런 삶을 자신과 쌍둥이인 이웃들과 함께 합니다. 자신과 쌍둥이인 이웃의 죄를 용서하며 살게 됩니다. 이웃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어떠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보듬으며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부탁하신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도마와 같은 신앙 가지고 주님이 부탁하신 삶을 살아가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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