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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이 거룩한 열정이 되다‘예수, 생명의 치유자’ 1(마가복음 1:30-31)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4.09 01:51
▲ John Bridges, 「Healing Peter’s mother-in-law」 ⓒWikipedia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앞으로 7주간 ‘예수, 생명의 치유자’라는 주제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이 보고하는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가 그 중심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열병이 거룩한 열정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마가복음이 보고하는 각각의 치유 이야기에 담긴 의미와 실천적 교훈을 살피기 전에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 자체가 가진 위상과 그 본질적 의미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구조적으로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이야기와 예수님 당하신 십자가 고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붙잡히시기 전까지 공생애 내내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적은 귀신 축출 기적과 치유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이 다루는 기적 이야기들 대부분이 귀신 축출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사실 귀신 축출도 치유 행위의 일부로 보아도 좋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왜 이렇게 치유가 중요한 것일까요? 의학지식과 의료기술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열악했기 때문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게 시급해서였을까요? 몸이 건강해야 건강한 삶도 가능하니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의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감안해 보면, 그렇게 보긴 어려울 것입니다. 몸은 멀쩡하지만, 멀쩡한 그 몸으로 유해하고 패역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으셨을까요? 그럴리가요? 신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불안과 우울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그저 육체적 질병이나 장애에 대한 치유 정도로만 이해해선 안됩니다.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과 함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곧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통치 행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은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가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경험적 실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향한 문이 열렸습니다.

어떻게요?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망각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실제적이고, 우리 손에 잡히는 세계보다 더 사실적인 세계가 우리의 존재와 삶을 에워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 손에 잡히는 세계가 전부인양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편협하고 일그러진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는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그간 우리가 줄곧 잘못 인식하고 판단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저 지식이나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이 확장되는 정도를 의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무지를 도드라지게 합니다. 우리의 아는 척을 가로막습니다. 우리 귀와 눈에 익숙한 것을 우리에게 낯설게 만들고, 우리 귀와 눈에 낯선 것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에 우리의 전 인격으로 반응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 전인적 변화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치유 사역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치유는 건강한 상태로의 회복이자 더 온전한 상태로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치유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친히 보이셨습니다. 우리를 치유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향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로써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살기 위해선 우리에게 그저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 사역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치유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두 육체적 질병 하나쯤은 안고 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맥락 속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죄라고 하는 치명적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또 온전히 반응하지도 못했던 건 우리가 죄라는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병인가요? 죄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감각 기능을 마비시키고 그 나라에 대한 반응 능력을 마비시켰으니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불안과 허무와 외로움을 불러일으켰으니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근본적으로 치유의 대상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병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그저 범법 행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죄를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 행위로 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죄책감도 다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위배했다는 사실에 대한 후회와 그에 대한 처벌의 두려움이 뒤섞인 게 죄책감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죄를 이렇게 범법 행위로 보면, 이 죄로부터 자유해지는 길은 용서를 받고 죄책에 대한 처벌을 면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용서를 받고 처벌을 면한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범법 행위를 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용서와 면책이 우리의 범법 행위, 우리의 불순종 그 자체를 해결해 줄 순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의문은 과연 예수님의 구원이 용서와 면책에 불과한 것일까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행위에 대해 용서는 하시지만 우리 행위를 개선하는 데는 무심한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이해를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나요?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죄가 그저 범법 행위가 아니라 그 범법 행위를 가능케하는 우리 내면의 근원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말에 현혹되어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불순종 곧 범법 행위의 근본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에게 진짜 죄는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자기 본분을 부정하는 일이자 자기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죄는 일종의 자기 본질로부터의 소외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폴 틸리히는 죄를 세 가지 차원의 소외라고 정의합니다. 첫째, 죄는 불신앙으로서의 소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단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와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에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태도와 행위를 말합니다.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에덴동산 동편 지역으로 멀리 도망하여 홀로살기를 시작한 가인처럼 말입니다.

둘째, 죄는 영적 교만으로서의 소외입니다. 자기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에게 도취되어 자기가 만들어낸 유한하고 상대적인 가치를 절대화시키며 결국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태도와 행위를 말합니다. 자기를 신격화한 제국의 황제들처럼 말입니다.

셋째, 죄는 무제약적 탐욕으로서의 소외입니다. 본래 하나님과 마주보는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과 분리 속에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끊임없는 갈증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외로움에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엉뚱하게도 정치 권력, 물질적 부, 지식에 대한 욕망과 충족으로 그 내면의 괴로움을 회피하는 태도와 행위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제약적 탐욕으로서의 소외이자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렇게 정의하면, 이 죄로부터 자유해지는 길은 소외 상태를 치유하고 하나님께로 정향된 자기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우리 죄를 용서하고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일을 넘어 우리 죄를 치유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는 일에 있습니다. 사실 치유의 관점에서 보아야 용서의 참된 의미도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범법 행위에 대한 용서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죄에 매인 우리, 깨지고 부서진 우리를 외면치 않고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당신의 품 안으로 받아들이셔서 앞으로도 영원히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겠다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온전히 치유됩니다.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기에 죄에 사로잡힌, 사망 권세에 매인 우리의 현실과 상황과 조건을 속속들이 아시고 그것을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사셨기에 사람에게 엄습한 치명적 병인 죄를 완전히 극복하셨습니다. 사람과 일치되어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과 일치되어 죄를 극복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죄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죄를 치유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힘과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고 의지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근본적으로 죄라는 병을 치유하는 사역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유형의 치유 사역은 이 죄라는 병이 우리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우리 삶을 어떤 위기와 위험으로 몰아넣는지,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주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죄라는 병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증상들, 결과들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한 예수님의 치유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이야기에 주목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셨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지칭합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시몬입니다.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를 치유하신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의 소식을 들었던 시몬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이었겠지요? 예수님이 당도하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시몬의 장모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건넵니다(막 1:30). 열병을 앓게 된 여러 정황들에 이야기했을 수 있겠지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가 시몬의 장모의 열병에 대해 별다른 단서를 주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과연 열병을 앓고 있지 않은지, 우리의 열병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우리에게 성찰의 공간을 열어주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가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지 말고, 자기 이야기로 들으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열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원어의 의미를 살려 표현하자면, 열병은 불이 타오르는 듯한 고열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쩌면 시몬의 장모는 열불이 나서 몸저 누운 것일 수도 있겠지요? 상상해 봅시다. 사위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에게 정신이 빠져서 가정과 생계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갔습니다. 자기 딸과 손주들의 앞날이 막막하니 속에서 얼마나 열불이 났을까요? 그렇다고 누구에게 함부로 말을 꺼내놓을 수도 없습니다. 출가외인인데 사위를 맘대로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사위도 나름 장모님에게 해명은 했겠지요.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분이십니다. 그분이 저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하지만 장모는 하나도 납득이 가질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을 내팽개 쳐?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딨다고? 고기를 낚아야 돈이 나오지 사람을 낚는다니 그게 말이 돼? 도대체 예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하루 아침에 이렇게 한 가정을 위기로 몰아넣는 거야? 정말 그가 메시아라도 된다는 말이야?”

시몬의 장모는 사실, 엄청난 내면의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분노와 걱정과 두려움과 의심과 궁금증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억눌려 있었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딸네 가정을 모른 척하며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정신없이 분주하게 이것 저것을 챙기다 보니 갑자기 탈진해 버린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심란한 마음에 피로까지 겹치니 지독한 감기 몸살이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은 내면의 혼란과 갈등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그 내면이 곪아 생긴 병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열병은 유사한 형태로 언제든 우리에게도 엄습해 올 수 있는 병입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데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 내면의 소리에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이것 저것 하는 일은 많지만, 이 일을 도대체 왜 하는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 이 일에 만족과 행복은 있는 것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내면의 문제 제기는 억압한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정말 자기 일에 온전히 몰두하며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나요?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억지로 견디며 일할 뿐인가요? 돈이라도 많이 벌면 괜찮을 것이라 자위할 뿐인가요? 자기 내면을 돌보지 않고 그저 일에만 치우치다 보면 우리도 열병을 앓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쉼이 필요합니다. 자기 내면을 살피고, 자기 삶을 성찰할 쉼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불안해 하고, 무엇에 그렇게 불만족스러운지, 남과 비교해서 그렇지 사실 이미 충분히 괜찮은 것은 아닌지 살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한 마음가짐과 방식과 목적을 달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내적 쉼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열병을 앓고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어떻게 치유하셨습니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사위의 마음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그녀에게 직접 보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어찌 사셨는지를 더 가까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가슴에 무엇을 품고 사셨습니까? 그분은 어떤 마음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으셨습니까? 그분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데 무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마가복음 1장 10절, 11절의 보고에 의하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가슴에 성령의 불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하는 일에 충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내면으로부터 주시는 기쁨과 만족 때문에 불만족스런 상황에도 감사하며 그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취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분의 손을 잡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 그 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물론 그녀도 예수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예수님께 의탁할 때, 우리에게 쉼이 찾아오고 우리 삶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내면을 치유하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우리가 뭔가 더 갖기 위해, 더 오르고, 더 취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분에게 사랑이자 기쁨임을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우리 삶을 의탁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녀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된 삶으로 이끄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체념과 푸념 속에서 살길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살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삶의 환경을 바꾸고 주변 사람을 달리함으로써 오는 게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곧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각을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하는 일이 맘에 안 든다고 마음에 드는 일만 찾아 해맬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목적을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지도 찾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으로 열병이 떠나가자 시몬의 장모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났습니까? 그녀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데 힘쓰기로 결단했습니다. 열병이 거룩한 열정이 된 것입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애쓰는지, 어찌 살아야 하는지는 살피지 않고 속이 다 곪도록 정신없이 바삐 살기만 했던 그녀가 이제 주의 나라를 위한 행복한 헌신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치유의 현장인 시몬의 집은 이제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외면당하고 희망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시몬의 집 문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고 새로운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이 치유의 은총을 통해 변화된 삶을 맛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의 나라를 위한 행복한 헌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실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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