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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들이 뿌리는 피가 조국 독립의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다른 길을 선택한 문상길 중위와 서북청년단 (2)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 승인 2024.04.09 01:57
▲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2중대 제4구대 문상길(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과 최세인(앞줄 왼쪽에서 4번째) 1년 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문상길은 새로 부임한 박진경 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 연대장을 살해했고, 최세인(후에 1군사령관, 대장 예편)은 진압군인 제11연대의 인사 주임으로 활동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뉴시스

손선호 하사는 법정 진술에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갈 기회가 있었으나 민족을 위한 거사이니 달게 처벌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 프락치였다면, 암살 직후 안 중위와 함께 한라산으로 피신하여 무장대와 합류하고 자신의 전공(戰功)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멈추기 위해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하였다가 사전 발각되어 처형된 본회퍼 목사의 희생적 죽음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하루 전인 1948년 8월 14일 오전 11시 반 미군법재판부 육군특별법정에서 문상길 중위(23), 신상우 1등상사(20), 손선호 하사(22), 배경용 하사(19) 4명에 대하여 총살형을 언도하고, 양회천 2등상사(25)에 무기, 강승규 1등중사(22)에 5년 징역을 언도하였습니다. 민주학련은 ‘문 중위의 애국적 의거에 총살형 언도를 철회하라’(8.13)고 주장하였고, 법학가(法學家)동맹에서는 ‘범행동기를 보아 총살형은 부당하다는 견해’를 발표(8.26)하였고, 인권옹호연맹에서는 “민족정의를 수호하는 견지에서 감형의 재결이 있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성명서(8.29)를 각각 발표하였습니다.

4명의 처형 집행 직전 배경용과 신상우 양인은 특사로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9월 23일 오후 3시 경기도 수색 기지(현 고양시 망월산 인근)에서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최후의 일언’을 통해 민족을 학살하는 군대가 아니라 민족을 위하는 군대가 되기를 기도하는 애국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문 중위: ‘23살을 최후로 아무 일도 못하고 가는 것은 유감이다. 조선 사람으로서 민족의 비애를 깨닫고 미국의 비호를 밧아 민족을 학살하는 자들이 되지 안 키를 바란다.’
손 하사: ‘항상 노래하는 군가를 부르고 나는 씩씩하게 돌아가겠다’고 말한 다음, 홍조된 얼굴로 목청을 높여 ‘혈관에 마주치는 애국에 깃발 용진 용진’을 부르다가 형틀에 나서 ‘오 하나님이시어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야 주소서’하고 마지막 기도문을 올린 다음 동(3시) 34분 5발의 총탄으로 형이 집행되었다”(<자유신문> 1948.9.25.)

옛 상관 김익렬 중령은 회고록에서 “(이들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드렸다”고 전했습니다. 해방이 되었으나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 것은 참된 독립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문상길 중위의 애인이었던 제주고녀를 나온 고양숙(18세)와 그의 어머니 윤장옥(45세)도 헌병에 연행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을 말한다>, 218쪽).

문 중위가 총살된 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병력을 제주에 증파하였습니다. 제주에 새로 부임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全島)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였습니다.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었습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의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어 160개 마을 중 130개 마을이 주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1948년 12월 6일 이승만은 서북청년단 단원 6,500명을 한국군에, 1,700명을 국립경찰에 편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군사령부일일보고(1948.12.13.)에 의하면 이 날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19일에는 250명의 단원을 경찰(25명)과 군인(225명)으로 추가 투입하였습니다.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3개 대대를 주로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시켜 강경진압작전의 핵심으로 만들었습니다.

강화된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자행되었습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계엄령이 선포된 제주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학살극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서북청년단을 ‘백색테러단’, 제주도민들은 ‘악의 그림자’로 기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윤정란, “한국 반공주의와 그리스도교-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34쪽)

말썽 많았던 서북청년단은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5년이 지난 2014년 11월 몇몇 사람들이(재건위원회 준비위원장 배성관)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김구는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건국을 방해했다”면서 서청단원 안두희의 김구 살해에 대해 ‘의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2023년 3일 오전 7시 30분쯤 제주4‧3평화공원 앞 도로에 도착한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탄 승합차를 제주시민사회단체가 차량을 막았고, 양측의 충돌을 우려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습니다.(<오마이뉴스> 2023.4‧3.)

제주 4‧3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구역 해제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정부 공식 통계(2019년 11현재) 의하면 4·3사건 전 기간 동안 14,442명이 살해되었고 행방불명자는 3,400명이었습니다.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7,624명)가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1,528명) 보다 5배나 많았습니다. 한편 제주평화재단은 희생자 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합니다. 3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며,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습니다. 2008년 3월 28일 ‘제주4·3평화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10월 28일 예장(통합)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는 기독교방송(CTS) 설교를 통해 “4·3 사건은 공산당 프락치 등 좌익 세력들이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발언했고, 2014년 6월 10일 총리로 내정된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2012년 교회 강연에선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말해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2021년 4월 2일 KBS제주방송이 문상길 중위에 관한 역사 다큐 <암살 1948>를 방영하자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는 4월 27일 해당 방송국 앞에서 이 역사 다큐는 “시종일관 남로당(공산당) 프락치인 암살자 문상길 중위를 정당화, 미화한 충격적 내용이라며 4·3사건의 폭동성과 반역성을 은폐 뒤집으려는 음흉한 책략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서울소재 하늘교회 김재동 목사가 4‧3사건 당시 박진경 대령에 대한 역할과 활동상을 상세히 설명했다고 합니다.(<제주경제일보> 2021.4.27.)

▲ 문상길 중위 생가인 기와 까치구멍집. 경상북도 민속문화제 69호 지정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암살된 박 중령에 대해서는 추모비와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1952년 11월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제주시 관덕정 경찰국 청사에 세워진 추모비가 마모되어 1985년 6월 제주 충현묘지에 재건립되었습니다. 추모비 뒷면에는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守道爲民)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단기 4281년 6월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주4‧3시민단체들은 2023년 3월 9일 “제주 4‧3 학살자 고 박진경 대령 추모비 바로잡아야”한다고 제주도의회에 청원한 바 있습니다.(<제주의소리>  2023.03.09.)

1990년에는 박진경 대령의 고향 남해군 남면 앵강고개 군민동산에는 그의 양아들인 박익주 전 국회의원이 주도해 박진경 대령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뒷면 ‘추모문’에는 “해방 후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보병 11연대장으로 부임해 불과 2개월 내에 공산반란 해방군 주력을 섬멸한 전공으로 육군 대령으로 특진했으나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해지역 시민단체들이는 2001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박진경 동상 이전운동이 벌였고, 최근에는 “동상 철거보다 친일, 민간인학살자의 추악한 과거를 알리는 표지석을 동상 앞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경남도민일보> 2021.04.01.)

한편으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대한 추념은 그들이 젊은 피를 바친 지 74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주4·3도민연대 등은 1948년 9월 23일 처형된 문 중위와 손 하사를 위한 진혼제를 2022년 11월 26일 두 분이 처형된 고양시 망월산 인근에서 봉행하였고, 순례단은 앞서 25일에는 경북 안동에 위치한 문 중위의 생가터 등도 방문하였습니다. 이 단체들은 2023년 9월 23일 두 번째로 같은 장소에서 두 분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하자는 추모 모임을 가졌습니다.

다수의 개신교인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의만행에 대한 개신교의 반성도 70년 만에 이루어 졌습니다. 2018년 제주지역 450개 교회가 참여한 4‧3연합 예배가 열렸는데, 신관식 목사는 설교 중에서 “우리(개신교)에게 4‧3로 흘린 눈물이 있었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 반성한 바 있습니다(<제주의소리> 2023.10.3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제주 4‧3 유족들과 국민에게 기독교인이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습니다. 이후 매년 추모예배를 이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NCCK와 제주4‧3평화재단은 2023년 10월 31일 4‧3평화교육센터 대강당에서 ‘제주 4‧3사건과 기독교 관련’ 학술심포지엄 ‘개신교 제주4‧3연구의 새로운 모색’을 최초로 개최했습니다. 김인주 목사(제주 봉성교회)는 4‧3 당시 개신교 인명 피해는 목회자 1명(이도종 목사), 교인 16명 포함 17명이며, 서귀포, 삼양, 협재교회는 무장대에 의해 건물 피해를 입었고 조수교회는 토벌대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이는 천주교나 불교보다 훨씬 적은 규모의 피해라고 합니다. 9연대 중대장이었던 이세호(광림교회 장로), 9연대 소대장이었던 채명신(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1950년 대정읍 예비검속으로 252명을 총살 지휘한 김윤근(영락교회 장로) 모두 개신교 신자였으며, 4‧3 토벌대 책임자였던 함병선과 김명의 이름을 따 제주 함명교회가 생겨났을 정도라고 합니다.

개신교인 100여명을 보호한 무릉지서장 김창준 순경, 화순지역 김병섭 순경, 중문지역 김두혁 경사, 서귀포지역 박용범 등 일부 경찰들도 4‧3 당시 개신교 신자들을 보호했고, 목회자들도 경찰에 협력하고 교인만 보호했다고 합니다. 김 목사는 “입산자 가족들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목회자가 참여했고, ‘손가락 총’ 사건으로 알려졌듯이 교인들만 살아남고 이웃이나 친구들이 구제받지 못하고 처형되는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이후 선교에 큰 걸림돌로 남아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오승학 전 대표(치유와평화를위한그리스도모임)는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당시 상황에서 민간인 학살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서 “4‧3 시기에 서북청년회가 속한 개신교인이 잔인한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잘못됐기에 교계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합당한 회개와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제주의소리> 2023.10.31.)

그러나 서북청년단에 대한 평가도 여전히 엇갈립니다. 이주연(<서북청년회>, 2015)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서북청년단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건국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들은 해방 직후에는 건국운동가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는 국군이나 유격대원이나 청년단원으로 좌익과 북한군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대다수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가족이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

반면에 김용택은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정치깡패. 백색테러를 수없이 자행하던 극우 성향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서북청년단이 지금의 한국보수개신교의 어두운 면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의 확장과 난립, 무리한 선교활동 그리고 90년대 이후 대형 교회들의 비리와 세습, 목사들의 성추행 등 사회적 범죄 행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던 한국 보수개신교는 서북청년단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이 살아남아 성장해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좀비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정적을 제거하는데 필요했던 존재이었기 때문이다.”(<뉴스프리존> 2020.2.12.)

기독교의 관점에서 4‧3 사건을 보면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같은 기독 장병들은 양민 학살을 명한 상관을 처단하여 기꺼이 제주 도민을 위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반면에 수많은 서북청년단원들은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이 공산당을 박멸하는 것’이라는 명분으로 무수한 양민학살에 참여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열렬한 반공 청년들이라 (기독교민주동맹 창립총회에) 가서 쳐부수고 해산시켰거든. 지금은 그 청년들이 다 장로 됐수다.”라고 했답니다.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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