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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무기력보고도 믿지 못하는 세상, 보지 않고도 믿는 세상(요한복음 20:19-29)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4.04.11 02:54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은 한 가지 점에서 모두 일치합니다. 그 등장인물들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부활의 첫 목격자가 한결같이 여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 어디에도 이들이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전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이 여인들을 향한 당시의 시선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에게는 성적 차별이 없었습니다. 여자라고 해서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역할에서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던 여인들은 분명히 사도들과 다르지 않는 몫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사도의 반열에서 제외된 것은 후대 교회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로 등장합니다. 이는 그 여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이야말로 부활의 진실을 가장 먼저 깨우친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남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유대 사회의 최고위층에 해당하는 사두개인들은 아예 부활 신앙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누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정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처음에는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은 일상의 삶 자체가 주목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사실상 죽음과 같았던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사건이었습니다. 요한복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진실을 전합니다(20:12~18).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입니다(20:19~23). 부활하신 예수께서 먼저 여인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는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전반부, 곧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죽음의 힘 앞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평화’로 임하신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은 충격과 공포로 두려워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아예 마음의 문마저 걸어 잠그고 있었다 할 것입니다. 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 문을 열고, 그들의 닫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스라엘에서 “평화!” 곧 “샬롬!”은 일상적인 인사말입니다. 우리말의 인사말과 똑같습니다. “안녕!”과 같은 뜻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인사말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예수께서는 평소에 누누이 그 인사를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도 그렇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당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 ‘평화’의 의미를 소중히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은 바로 그 ‘평화’를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에서 ‘사랑’과 ‘평화’는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단 한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반면,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일곱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어째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평화를 강조하셨고, 초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게 평화를 갈망했을까요?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평생의 기간은 전쟁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등극한 그 시기는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일컬어지는 태평성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기간은 바로 그렇게 로마가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로마의 지배력이 세상 곳곳에 미쳐 평화가 정착되었다고 믿는 바로 그 시기에, 예수님은 ‘평화’를 기원하는 목소리를 외치고 다니십니다. 이 사실이 아니러니합니다. 평화의 시기에 평화를 외치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제국 영토 곳곳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데, 예수님은 “평화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잘나가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들, 그래서 삶 자체가 고통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충격과 공포로 내리치는 힘 앞에서 목소리를 죽이고 있을 뿐, 그 삶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그렇게 숨죽이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내린 평화입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내린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그 평화의 소망을 오늘 일깨우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기원할 뿐 아니라, 그 평화를 이루는 길을 또한 제자들에게 일러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 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쌓았던 장벽을 허물라는 것입니다.

▲ 세월호 참사 앞에 우리는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의미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추상적인 도덕적인 죄라기보다는 사람들을 ‘죄인’의 상황으로 내모는 현실을 말합니다. 누가 그렇게 ‘죄인’으로 내몰렸습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악해서 죄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정죄 받고 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멸시받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일이 안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사하라’는 말은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를 거두어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장애를 딛고 일어서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된 사람들은 계속 남을 것이며, 따라서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죄’의 장벽을 없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곧 그 장벽이 사라지는 사건이 곧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놀라운 이야기 다음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예수 부활체험 이야기입니다. 어쩐 일인지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도마는 자신이 보지 않고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그러니까 부활 후 일주일이 지난 후 예수께서 도마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역시 문이 잠겨 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지난번과 똑같이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다음 도마에게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도마가 만져 보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0:28) 도마는 예수님에 대해 최고의 극적인 고백을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0:29). 흔히 이 이야기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를 깎아내리는 이야기로 해석되고 인용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러한 이해는 의심하고 따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교회의 전통이 만들어 낸 일종의 곡해일 뿐입니다. 여기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 최고의 고백을 하는 제자로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5, 마가 6:29, 누가 9:20)에 상응하는 고백을 하는 제자로서 몫을 맡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도마는 믿음이 부족한 제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디지만 충직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11:16; 14:5 참조). 늦깎이 또는 대기만성형이라고 할까요? 의심이 많아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생각이 많아서 물음이 많고, 그래서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받아들일 때 확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서 믿은 사람은 도마뿐이 아닙니다. 여인들도 그랬고, 다른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더욱이 요한문서는 ‘보고, 듣고, 만져본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서신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요일 1:1)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직접성, 관계의 친밀성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들이 그렇게 보고 만져 본 것처럼 생생하게 예수 그리스와 삶을 공유한 것을 큰 복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질책이 아닙니다.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더 복이 있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가 기록된 상황을 반영합니다. 빨리 잡아도 80년, 아니면 대략 100년 어간이 요한복음의 기록연대인데, 이즈음이면 실제로 예수님과 삶을 함께 나눈 세대는 다 사라진 상황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그리스도인을 두고 격려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축복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어째서 도마가 보고서야 비로소 믿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셨을 때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삶의 연속성을 말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아무 문제 없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은 부활이 이전의 상태와는 다른 극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 그리고 도마가 보고서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목격한 예수가 다른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삶을 살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실제 역사 한 가운데서 사랑의 삶, 평화의 삶을 보여주셨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비로소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확고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첫 세대는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고 만져 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삶 가운데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그다음 세대는 어떻게 그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이들은 첫 세대, 곧 첫 번째 증언자들의 증언의 진정성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보고 만져 본 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게 된 구체적 경로는 첫 번째 증언자들의 증언의 신실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증언은 단순히 말이 아니었습니다. 언행이며, 곧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이중의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지 않고도 믿는 복을 누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번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믿는 바를 삶으로 증거해야 하는 증언자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신뢰의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 근거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보지 않아도 누군가는 마땅히 해야 할 몫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 또한 숱하게 경험합니다. 보니까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일들 천지 아닙니까? 10년 전 우리는 생중계되는 TV 화면을 통해 세월호가 서서히 잠겨가고 있는데도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믿기지 않은 현실을 보았습니다. 보니까 믿을 수 없는 우리 사회 모든 현상의 가장 선명한 본보기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일은 10년이 지나는 동안 숱한 형태로 재연되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삶이 가까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 없거니와 먼 곳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진실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런 존재, 그런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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