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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밖으로 나오다‘예수, 생명의 치유자’ 2(마가복음 1:41-42)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4.16 03:14
▲ Jean-Marie Melchior Doze, 「Jesus cleansing a leper」 (1864) ⓒWikipedia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 생명의 치유자’라는 주제로 말씀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경계 밖으로 나오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속한 집단 또는 사회로부터 거부되거나 소외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의 평가에 매우 민감합니다. 굳이 그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에게 어느 집단이나 사회에 소속되어 친밀한 관계를 맺는 행위는 당연한 일이고, 우리 삶의 기본 욕구이자 기본 조건입니다. 타인들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과 원활한 상호 교류 없이는 사실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만족도, 삶의 온전한 성숙도 없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그래 왔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욕구 충족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엄마와 상호 작용하면서 그 자아 구조와 기능이 발달해 갑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관계를 다변화하고 관계의 폭을 확장해 가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

우리가 특정 사회에 속하여 그 사회와 친밀해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우리의 정신과 행동양식 속에 그 사회를 깊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가 속한 사회의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세계관과 가치관도 우리가 속한 사회의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양식은 사회적 모방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속한 사회는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이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소외당하면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에서의 소외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일 터입니다.

사회에서의 소외를 두려워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 아무런 성찰 없이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이것을 사회학적 용어로 ‘순응 편향’이라 칭합니다. 순응 편향과 관련된 예로, ‘삼인성호’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려 보십시오. ‘세 사람이면 호랑이를 만든다’는 뜻인데, 풀이하자면,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말하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도로에서 세 사람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 그 도로를 지나는 사람은 하나같이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런 현상도 순응 편향의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응 편향은 큰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 불의하고 비합리적인 편견이나 거짓에 기초한 신념이 통용되고 있다면, 우리의 순응 편향은 우리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응 편향이 우리를 집단적 악과 폭력의 가해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 시절, 일본인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 볼까요? 일본 사람들이 전부 뿔 달린 사탄이라서 우리에게 그런 폭력을 행사했나요? 그들도 사실은 평범한 소시민들이지만,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 그저 순응할 뿐, 타국민의 입장에서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문제의식 없이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악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모두 유익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통념에 대한 적절한 거리두기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빛과 성령의 내적 조명을 의지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나병환자를 대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나병환자는 당연히 격리의 대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였습니다.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얼마나 큰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인지를 헤아려 봅시다. 그가 가졌을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까요? 수치심은 거절과 조롱과 외면의 아픔이 깊어 나조차도 내가 부끄럽고 나조차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정서 중 하나입니다. 이 수치심이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일을 얼마나 주저하게 만들었을까요? ‘만약 예수님에게까지 거부당하면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을까’ 두려워했을 게 분명합니다.

이 수치심을 강화시키는 것은 물론 혐오의 시선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수치심이 폭발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것은 곧 혐오의 시선을 유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로 다가가려면 그 혐오의 시선을 감수하고 감내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여기가 어디라고, 당신 같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올 생각을 해?’라고 강하게 제지를 할지도 모릅니다. 나병환자가 사람들 틈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곧 자기에게 둘러쳐진 사회적 경계 밖으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데 이렇게 큰 난관들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병환자가 지금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의 멘탈이 남달라서였을까요? 그의 곁에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 희망을 그분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라면 나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를 받아주실 것이란 신뢰가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용기는 마냥 두려워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이유, 마냥 주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에 대한 확신을 뜻합니다. 나병환자는 그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찾았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신적 권능을 신뢰한다는 표현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유일한 희망입니다’라는 간절함과 절실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온전한 내어맡김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것으로 그쳐선 안됩니다.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겨야 합니다. 온전한 내어맡김은 ‘당신이 제게 하시는 일은 옳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바벨론 왕의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그 징벌로 풀무불에 던져질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바벨론의 왕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이 고백이 바로 온전한 내어맡김입니다.

온전한 내어맡김은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옳다고 믿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런 일들 때문에, 계속되는 악한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궁극적 선의지를 의심하는 것은 우리 삶의 희망을 폐기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 세상,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힌 이 세상을 치유하셔서 만유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30편 11절의 고백처럼 우리의 슬픔을 마침내 춤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선의지를 신뢰하면서 우리 현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수용하는 게 바로 온전한 내어맡김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저를 깨끗하게 해주세요. 저를 치유해 주세요’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낫고 싶다는 내 열망이 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 당신의 마음과 뜻과 의지가 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낫고 싶다는 열망보다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낫고 싶어 나았더라도 주님을 향한 갈망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내게 좋은 일인가요? 당장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여전하다면 고통 중에도 나는 여전히 선하신 주님께 속해 있는 것 아닌가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할 수 있나이다’는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더럽고 혐오스러운 저 같은 사람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향해 어떤 마음을 품으셨습니까? 그분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불쌍히 여기다’를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로 표기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애간장이 녹는 아픔으로 바라보다는 의미입니다. 나병환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에는 자비가 전부였습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편견이나 혐오 같은 게 자리잡을 틈이 없습니다. 차별이나 적대가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역으로 그분의 자비하심이 뚫지 못할 벽도 없습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물도 없습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에는 경계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쯤에서 나병에 대한 유대 사회의 편견에 대해 숙고해 볼까요? 나병환자는 낫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깨끗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나병은 더러운 것이고, 나병에 걸린 사람은 더러운 사람이라는 유대 사회의 편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은 레위기의 정결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법은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는 법이자, 부정한 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례입니다. 특별히 나병에 관한 규례는 레위기 13장과 14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법이 나병을 부정한 것으로 구별하고는 있으나 나병을 결코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레위기의 정결법이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부정하다라고 구별된 것들은 대체로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육식동물을 보십시오. 다른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는 동물들입니다.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뱀과 같은 땅을 기어다는 동물들은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땅 밑 스올의 세계를 연상시킵니다. 몸 밖으로 피가 유출되는 상황 역시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을 부정하다라고 구별하고 경계하게 한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레위기의 정결법이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는 둘째 이유는 우리 생명을 지키고 온전케 하는 데 있습니다. 나병과 같은 피부병을 보십시오. 생명의 온전함이 깨진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전염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일정 기간 격리가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추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레위기 14장을 보면 나병이 나을 경우 그것을 공적으로 확인시켜주고 공동체에 잘 받아들여지도록 속죄의례와 절차를 상세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를 더 이상 나병과 짝지어 생각하지 말고 그를 더러운 사람 취급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나병을 부정하다 구별한다고 해서 나병에 걸린 사람을 더러운 사람 취급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코로나 감염자들을 일정 기간 격리했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이 레위기의 정결법을 곡해했습니다. 나병과 나병환자를 동일시했습니다. 나병을 경계하는 일을 넘어 나병환자를 정죄하고 혐오했습니다. 나병환자를 격리하는 정도를 넘어 공동체에서 아예 배제시켰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나병환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사실 상당수는 오히려 나병환자들이 그렇게 취급받는 건 부당한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남들이 다 나병환자를 저주 받은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하는 데 난들 어찌할 수 없다는 식이었을지 모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대로 사회에서의 소외를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순응 편향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그분에게는 편견이나 거짓일지도 모를 사회적 통념에 대한 순응 편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순종 편향이 작동했습니다. 자비와 사랑에 대한 편향이 작동했습니다. 그분은 사회의 통념과 인습보다 진리와 성령께 편중되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의 마음에 사로잡혀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행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때, 그것은 곧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선의지의 표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른 누군가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식의 생각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나병환자의 피부에 대셨습니다. 피부는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와 너를 구별해 줍니다. 다른 하나는 나와 너의 교감과 교류를 가능케 합니다. 우리가 주변 환경과 사물과 사람을 지각하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은 피부에 있는 감각들 때문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지금 이 피부가 손상된 상태입니다. 너와는 구별되는 내가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수치심으로 무너진 상태를 상징합니다. 자기사랑이 멈춰 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남들의 시선에 짓눌려 자기 시선을 잃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사회적   소외와 단절 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상태를 상징합니다. 소통이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자기 세계에 갇힌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경계가 무너진 나병환자의 피부, 사회적 경계 때문에 소외되고 소통이 단절된 그의 피부를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피부에 손을 대자 그는 잃어버린 자기 감각을 되찾았을 터입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구나.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구나.’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의 감각도 되찾았을 터입니다. ‘나도 당당히 저들 앞에 서서 저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나 자신을 저들에게 표현하리라.’ 이런 느낌이 그의 내면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피부를 만지시면서 동시에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선포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명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 아닐까요? ‘나는 네가 더럽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 사회에서 소외된 네가, 스스로를 저주하는 네가, 이 사회로부터 수용할 게 겨우 혐오의 시선뿐인 네가, 속이 쓰릴 정도로 아플 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을 네가 받아들인다면 너는 더 이상 더럽다는 의식에, 수치심과 소외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너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네 자신을 세상에 표현해도 좋다. 너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너와 진정으로 소통할 사람들이 네 곁에 분명히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터치와 선포로 나병환자에게서 나병이 떠나갔습니다. 나병이 떠나간 그에게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막 1:44). 한마디로 ‘이 치유의 은총을 그저 말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너를 더럽다 칭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너 자신을 보이되, 거룩한 삶에 헌신하는 네 모습을 보이라.’ 이런 의미였습니다. 나병환자를 더러운 사람 취급하던 사람들은 정작 나병보다 더 더러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쏟아내고 있으니 예수님이 하신 요청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나병환자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귀한 나,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나에 대한 감각과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고유한 인격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과 온전한 의사소통을 나눌 감각과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마음과 손길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선의지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병환자를 소외시켰던 유대 사회와 무관합니까? 그저 사회에서의 소외를 두려워할 뿐,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갖가지 생각과 신념과 행동양식들에 그저 순응할 뿐,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말씀하시는 성령께는 둔감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편향, 성령께 대한 감각의 편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손 내미시는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겨 우리 안의 나병으로부터 자유케 되시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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