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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살이 된 호성이 엄마세월호참사 10년, 정부자 님 이야기
정리연 | 승인 2024.04.16 03:29
▲ 호성이 엄마, 정부자 님을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근거도 없는 비난과 조롱, 혐오 발언이 너무나 힘들다고 했다. ⓒ정리연
내 아이의 이름은 신호성입니다. 내 삶의 전부였습니다. 남들 다 겪는 사춘기 시절에도 고단한 엄마 챙기느라 투정 한번 안 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잃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 세월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그 순간 나는 산 채로 죽었습니다.
- 정부자 외 7인, 《책임을 묻다》, 굿플러스(2024.4.16.) 중에서

“산 채로 죽었다.” 자식을 잃은 심정을, 삶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호성이는 어떤 아이였나요?”라는 질문에 엄마는 호성이를 생각하며 밝게 웃었다. “호성이는 딸 같은 아들이었어요. 집에 오면 학교에서 있었던 재밌었던 일이나 속상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곤 했어요. 엄마한테 말하고 나면 마음도 풀리고 좋다면서요. 그러면서 저한테도 꼭 물어봤어요. ‘엄마는 오늘 하루 어땠어? 별일 없었어? 정 여사 생일 축하해! 정 여사 맛있어! 역시 짱짱!!! 정 여사~ 옷도 어두운색 말고 밝은색 입어~’ 남편하고 다툰 후에도 호성이한테 다 얘기하면서 풀었어요(웃음). 제가 많이 의지했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그렇게 살갑고 친구 같았던 호성이에게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야기했었는데, 아이를 잃고 난 후엔 미안했다고 한다. 누군가 좋은 빛으로 안내해줄 때, 떠나야 하는데 엄마가 걱정되어서 못 갈까 봐, 마음이 아팠다고.

“아직 호성이 사망 신고를 안 했어요. 아이의 방도 물건도 그대로 있고.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되면 보내줘야지, 하면서 10년 동안 붙잡고 산 것 같아요. 호성이가 사용하던 물건 중 일부는 49제 때 태워줬고, 생명안전공원이 만들어지면 거기에 일부 놓고 나머지는 태워야지 했었어요. 그런데 생명안전공원은 아직 시작도 못했고, 호성이 물건들은 방에 그대로 있다 보니까 큰아들이 있을 공간이 없어서 따로 내보냈어요.”

엄마는 매일 호성이 방에서 호성이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호성이가 전에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며칠 전에는 호성이 사진을 보며 “엄마 쳐다보면서 걱정만 하고 있지 말고 좋은 데로 가. 미안해. 엄마 가면 얼굴 보여달라는 말 안 할게. 거기서 사랑 많은 엄마 아빠 만나서 살고 있어. 우리 나중에 우연히 만나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벌써 세월호참사 10년이 되었는데 바뀐 건 없고, 힘들지만 이 아픔을 알아버렸으니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더는 이런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질게도 악착같이 걸어온 여정이었다. 다른 가족은, 어떻게 지냈을까?

그날 이후 거리 곳곳이 우리에겐 지붕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청운동 주민센터 앞, 경복궁 현판 앞, 안국동 사거리, 광화문 광장… 어린 시절 아이 손을 잡고 나들이 다녔던 그 거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경찰차에 가로막혀 들어설 수도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 정부자, 《책임을 묻다》 중에서

참사 후 5월 2일에 호성이를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아빠는 23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4년 정도 함께 세월호가족협의회 활동을 하다가 다시 취업했지만, 적응하기 힘들었다. 직장 동료들이 세월호에 대해 잘못된 말을 해도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계속 눈물이 나오고, 자꾸 불량품이 나와 다른 동료들까지 야근하게 만드는 상황이 늘어났다. 기계에 다쳐서 오기도 했다.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얘기를 나눴어요. 제가 활동을 하고 아빠는 집에서 살림을 하기로. 아주 잘하고 있어요(웃음).”

세월호 참사 때, 호성이 보다 7살 위인 첫째 아들은 제대 후 막 복학해서 대학교 2학년이었다.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너는 네 인생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방을 얻어 나가 살게 했다.

“처음엔 첫째가 그러더라고요. 엄마가 그렇게 아픈 몸으로 돌아다니면 호성이가 좋아할 것 같냐고요. 그리고 호성이와는 다르게 원래부터 말이 별로 없는 성향인데다가 별 표현이 없길래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언젠가 그러더라고요. 세월호 싫어. 세월호 가족인 거 싫어. 직장에서 동생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등본 상에는 동생이 있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요. 첫째와는 거리감이 좀 있죠. 아들이 아파하고, 싫어하니까 아예 분리를 시켜버렸잖아요. 원래도 말이 별로 없는데 대화도 자주 안 하게 되니까, 교감이 좀 없다고 할까요? 서울에 있다가 최근에 안산으로 다시 이사를 왔어요. 전보다 좀 더 밝게 대화하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단계예요.”

실제로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이 겪고 있다고 한다. 세월호 유가족인 걸 말하면 직장 내에서 다른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숨기는 경우가 많다.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그다음부터 사장과 동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엔 “넌 좋겠다. 돈 걱정 안 해서”라는 식의 폭력적인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적응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하거나 약을 먹으며 집에만 있는 형제자매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 잃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으니 남아있는 자녀가 하루아침에 그들을 돌봐야 하는 보호자가 되어버린 가정도 많다. 온 가족이 병들어 있는데 사회에서는 그들을 향해 혐오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는 다가와 함께 울어주었고, 또 누군가는 침을 뱉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17년을 고이 키운 아들을 잃었건만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순수 유가족인지 아닌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도 쳤습니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순간부터요.
- 정부자, 《책임을 묻다》 중에서

많은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유가족을 향한 악성댓글과 조롱, 비난과 혐오 발언도 무수히 쏟아졌다. 가난한 집 아이들, 시체팔이 같은 프레임을 씌우고 세월호참사를 교통사고에 빗대는 등 막말을 해댔다. 언론은 보상금 액수를 보도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지우고, 배·보상이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혜택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언론, 정치권뿐 아니라 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10년의 세월 동안 다양한 책들을 발간하며 진실과 아픔을 알리기에 최선을 다했다. ⓒ정리연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을 향한 근거도 없는 혐오 발언, 너무 힘들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 피해자들이 전국으로 애타게 돌아다니던 어느 날, 예진 엄마 박유신 씨는 광화문에서 혹독한 하루를 보내고 밤늦게 안산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네 언니가 새로 연 마트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부담을 줄까 싶어 언니에게는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대했다.

“언니가 마치 남 얘기하듯이 세월호 유가족 이야기를 저에게 하더라고요. 우리 집 이층에도 유가족이 살아. 새벽에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서 소름 끼쳐 죽겠어. 너처럼 이렇게 지내야 하는데 그 사람은 맨날 울어. 누구는 전자제품 다 바꿔서 안양으로 이사 갔다며? 너 그 사람 누군지 알아?” 안산시에서 희생자가 집중된 고잔동, 와동, 선부동 일대는 참사 발생 후 한동안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 마을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피해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밀착된 거리감은 피해자를 행동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슬픔을 회피하려는 욕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와중에 보상금을 둘러싼 이야기가 퍼지자 적대적 분위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예진 엄마 박유신).
-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520번의 금요일》 중에서

 

“가난한 부모, 한부모, 공단에 다니는 부모라면서 아이들을 삼류 드라마로 만들더라고요. 우리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서 사나요? 떳떳하게 일해서 살았어요. 그런데 자꾸 그런 식으로 만들어서 보상금 몇 푼 주면 다 그냥 해결될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산 시민들도 세월호 유가족들 가구 바꾸더라, 차 바꾸더라, 이사 가더라고 말을 하는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해수부는 ‘위로지원금’(국민성금에서 배분)과 ‘보험금’(보험사 지급)까지 포함된 금액을 더한 액수를 해수부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얼핏 보면 지원금과 보험금까지 모두 배상금으로 착각하기 좋았다. 가족협의회는 “정부가 피해자들을 돈만 바라고 떼쓰는 사람들로 만들었다”고 분개했다. 그리고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이 마무리될 때까지 배·보상 절차를 전면 중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2015년 4월 2일 52명의 회원이 삭발투쟁에 나섰다.

“한 집 건너 아이들이 희생이 되었는데 내 이웃은 그것만 보일까? 처음엔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러다가 마을에 다니면서 이야기했어요. 나이 들어서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일하고 아끼면서 살았어요. 그냥 좁아도 살다가 재건축하게 되면 그때 좀 더 넓은 집으로 가서 살아야지. 애가 신발 사달라고 했는데, 새 신발 신고 수학여행가면 발 아프고 뒤꿈치 까져. 신던 거 신고 가. 물건 하나 사달라고 하면, 그러면 이번 달 계획에 어긋나지~ 하면서 살았는데, 막상 애가 가고 나니 인생이 짜증나고 너무 구질구질해서 가구도 바꿨나 봐요. 아이 방에 들어가면 아이가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고 음성도 들리는 것 같고, 여기를 떠나면 생각이 안 나겠지, 덜 아프겠지 싶어서 이사도 갔나 봐요. 지금은 후회스러워서 안산으로 다시 오고 싶어도 집값이 너무 올라서 못 온대요. 이렇게 얘기해요.”

사람들은 호성이 엄마가 웃으면 아이를 잃고 뭐가 그리 좋으냐고, 울면 맨날 울기만 한다고 했다. 유가족들이 다 그랬다. 웃어도 울어도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생명안전공원’ 공식 발표 이후 갈등은 더 심각해졌다. 2018년 2월 20일, ‘봉안시설을 각춘 추모공원을 화랑유원지에 조성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세월호참사가족들이 투쟁해온 결과였다.

▲ 생명안전공원 인근에 자리잡은 4.16세월호유가족협의회 사무실 ⓒ정리연

생명안전공원, 좀 더 안전한 세상을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화랑유원지는 안산 시민들이 자주 찾아 힐링하는 장소이다. 단원고등학교를 마주보고 있기도 하다. 유가족들은 이곳에 생명안전공원을 만들어서 추모와 다른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했다.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한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주민들은 반발했다. 가장 큰 이유는 ‘집값’이었다. 그들은 안산의 미래를 슬픔과 죽음에 가두는 일이라면서 안산시청 앞에서 매주 집회를 했다. 지역 갈등을 해소하기 힘써야 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추모공원 문제를 이용했다. 안산의 심장 화랑유원지에 세월호 납골당이 들어올 수 없다는 현수막에는 섬뜩한 해골 그림이 그려 있었다.

유가족들은 참사 이후 특별법 제정 활동으로 전국을 다니느라 안산을 비웠었다. 안산 시민들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이웃들을 만났다. 어색하고 이상했을 것이다. 호성이 엄마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마을로 더 깊이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산 시민들이 유가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야속해할 게 아니라, 자신들이 먼저 그들의 마음에 다가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리가 광장에 나가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거리감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민단체들한테 이용당해서 높은 사람들만 만나고 다닌다, 맨날 손 흔들고 떼쓰고 투쟁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안산이, 내가 사는 고잔동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거지? 우리가 사는 마을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아예 귀를 닫아버렸어요.(윤희 엄마 강순길)
- 《520번의 금요일》 중에서

 

“생명안전공원은 우리 아이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에요. 사회의 안전을 위한 곳, 우리의 모든 아이들이 위험에 방치되어 있는데,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주민들을 만날 방법을 많이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416가족나눔봉사단을 만들었죠. 김장도 하고 음식을 해서 노인정마다 찾아가요. 명절에는 혼자 사시는 분들에게 떡이랑 음식을 해서 가져다드리고요. 시에서 여는 거의 모든 행사에 찾아갔어요. 음식을 해가고, 공방 엄마들이 체험 활동을 진행했어요. 처음엔 따갑고 노골적으로 쳐다보던 시선도 지금은 많이 변했어요.”

호성이 엄마도 처음에 마을 주민들을 만날 때에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안산을 떠날 핑곗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떠나면 아이한테 너무 미안하니까. '그래, 안산 사람들아, 나한테 실컷 욕해라. 그러면 나는 호성이한테 당신들 핑계 대고 안산을 떠날 거다!는 오기로 그냥 막 부딪혔다. 

“내 몸을 더 아프게 만들어야, 더 아픈 소리를 들어야 내가 지쳐서 떠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생명안전공원이 완공된 후에도 마을분들하고 같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을분들과 계속 소통하고 연결이 되니까 어느 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살아야 한다면, 똑바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저도 성찰이라는 걸 하고 성장도 하더라고요. 약을 먹는 게 치료가 아니라 이런 게 치유가 아닌가 싶어요.”
- 《520번의 금요일》 중에서

여전히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은 있지만 호성이 엄마는 ‘생명안전공원’을 포기할 수 없다. 말했듯이 그건, 떠나간 아이들이 아니라, 남겨진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해서이다. 아이를 잃은 아픔이 어떤지 너무 잘 알기에 더는 그런 아픔을 겪는 부모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다. 10년이 지났지만 바뀐 게 없다. 이태원참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수학여행 가던 아이가 갑자기 잘못됐는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왜 단원고 학생들을 지명하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누가 잘못한 건지 밝혀달라는 게 그렇게 잘못된 요구인가요?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대통령이 왜 필요한가요? 대통령이 나서서 책임질테니 모든 걸 밝히라고 하면서 국민을 지켜줘야 하는데, 저희는 그때 아예 버림을 받았어요. 청와대는 책임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만 했고 증거와 자료를 볼 수 없도록 봉인해버렸어요. 유가족을 철저히 고립시키면서 괴롭혔어요. 우린 모두 열심히 일하고 꼬박꼬박 세금 매면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아이를 잃고 진상을 알고 싶어하는 부모들을 거리에서 경찰과 차로 가두고 외면했어요. 책임자 처벌이라는 게 똑같이, 잔인하게 죽으라는 거 아니에요.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사회 시스템을 바꾸자는 거예요.”

호성이 엄마는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바꿔보고자 밤낮없이 거리를 헤맸다. 그런다고 죽은 호성이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컴컴하고 차가운 바닷속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만히 있으면 죄책감이 심해져서 몸을 더 혹사시키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치아가 망가지고 망막 수술도 했다. 갑자기 살이 쭉쭉 빠져서 병원에 가보니 갑상선저하증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했다. 쓸개에 온통 돌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유가족들 모두 3개 정도는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정신과 약은 기본이고요, 스트레스랑 합병증으로 약을 한 움큼씩 먹으면서 다니죠. 처음엔 아파도 병원에 안 갔어요. 내 자식은 산 채로 갔는데, 병원에 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다들 그렇게 참고 버티다가 갈 데까지 가고 나서야 병원을 갔죠.”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었다

▲ 지난 3월 29일 새길교회가 마련한 416세월호 10주기 추모와 기억 모임 및 예배 시간에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과 함께 참여해 대담을 나눈 호성이 엄마, 정부자 님(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리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잊히기도 하고 시민들은 쓴소리를 했다.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언제까지 죽은 애 우려먹을 거냐고. 아프고 병든 몸과 마음을 질질 끌면서 10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만해야겠다고, 이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까?

“시민들의 힘이 컸어요. 전국 각지에서 함께 해주셨지요. 받은 게 정말 많아요. 그걸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그리고 저는 원래 불교였는데 지금은 교회를 더 자주 가요(웃음). 호성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다니던 절 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아이는 좋은 데로 갔으니, 건강 챙기면서 살아라. 왜 여자 대통령한테 그러느냐…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좀 기다려 주면 좋겠는데, 제가 믿는 종교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너무 서운하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안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호성이는 혹시라도 그곳에서 자기가 믿던 불교에 의지하고 있을까 봐 아예 끊지는 못하고 가끔 가긴 하지만 제 믿음은 많이 없어졌어요. 종교란 뭘까, 라는 고민도 많이 했어요.”

자식을 잃고 국가에게도 버림 받았던 당시, 살아서 뭐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왜 나만 유가족이 되어야 해, 당신들도 똑같이 자식을 잃어봐야 알겠느냐는, 반항심 같은 것도 생겼다고 한다. 그때 호성이 엄마를 위로해 준 건, 기독교였다.

“다들 떠났는데,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주고 있어요.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목사님들 설교를 듣거나 신앙인들이 곁에 있으면 그래요, 알아요. 그 마음 알아요 하면서 제 마음을 만져주는 것 같았어요. 저도 제 자식 성장하는 거 보면서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싶은데 왜 이렇게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살아야 해? 왜 우리한테만 이래? 싶다가도 꾸준하게, 한결같이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청와대 분수대에서 광화문에서 목포에서 등 전국에서 예배로 기도회로 해주고 계시잖아요. 저분들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래. 저 말씀이 맞지. 내 자식이 아무리 비참하게 갔어도 나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되지.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것 같아요. 내 자식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갔지만, 304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게, 이 아픔을 안 부모가 할 일이지. 우리 아들 딸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사는 거, 그게 우리가 해줘야 할 일이지. 이렇게 마음을 바꾸게 된 게 꾸준한 기도와 함께한 분들 덕분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가끔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해요. 저는 불자인데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있다고요(웃음).”

호성이 엄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기독교인인가?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안산과 물리적으로 먼 지방에 살고 있었다는, 막 9개월 된 아기와 3살, 4살인 아이들을 키우며 사느라 다른 데에 힘을 쏟을 수 없었다는, 마음으로는 함께 했다는 변명은 궁색할 뿐이었다. 내 아이들이 점점 성장해가니 세월호참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엄마로서 아주 조금이나마 유가족들 심정을 아주아주 조금 알 것 같다고 여겼던, 이기적인 마음이 부끄러웠다. 세월호참사로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들이 닦고, 만들어 가고 있는 안전사회의 길에 내 아이들을 걷게 하겠다는 것이니. 이러는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4.16생명안전공원은 2022년 7~8월에 공사 발주와 계약을 진행하고 9월 착공, 2024년 4월 16일 10주기 전에 완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행정 절차가 지연되고 코로나가 겹치면서 물가가 상승했다. 예정한 규모로 진행하면 총 공사비가 500억 원을 넘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특별법에 의해 예비 타당성 조사가 면제된 사업이지만, 정부는 굳이 사업 적정성 검토를 추가 진행했다. 규모를 줄이고 다시 설계하고... 올해 가을에는 첫 삽을 뜨겠다고 하지만 착공 일정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다. 시민들의 관심이 하루라도 더 빨리 일정을 당길 수 있다면서 호성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안산시청, 시의회에 전화를 하거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주세요. 담당자분들에게 뭐라고 해달라는 게 아니라, 관심을 보여주시면 좋겠어요. 수고하신다는 격려도 해주시고, 안산생명안전공원 진행이 잘 되게 힘 써달라고, 응원하고 있다는 한마디라도 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는 호성이를 생각하면 전보다는 웃게 된다는 정부자 님. 어서 빨리 안산화랑유원지에 ‘생명안전공원’이 만들어져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호성이와 친구들이 원래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다시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운명이다》라는 책에서 그랬다. 20년 정치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람 사는 세상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라고 스스로 질문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그러셨고, 몇 정치가와 개혁자들이 그러했다. 아닌 것 같지만 버벅거리면서도 조금은 바뀌었고, 바뀌고 있다. 지금은 자신의 심장을 떼어 하늘의 빛으로 올려보낸 엄마 아빠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 그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조금씩 밝혀가는 길에 우리의 발걸음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들을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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