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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나고 배제 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 하늘에 닿다더 멀리 보시는 하나님(창세기 16:1-16)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4.04.17 02:19

본문 말씀은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정실 사라와 그 아들 이삭의 이야기를 잘 기억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소실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성서를 선민의 구속사에 관한 이야기로만 바라보는 시선 탓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서는 그 시선을 벗어나는 전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사라와 그 아들 이삭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에 관한 이야기 또한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의 기원이 되는 인물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유대인의 조상으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사라와 이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 그리스도인 역시 그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무슬림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하는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성서를 보면서 우리는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두고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터인데, 두 이야기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것이 뜻하는 바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성서 창세기가 전하는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환기해 볼까요?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갖지 못한 아브라함은 그의 부인 사라의 몸종인 이집트 여인 하갈에게서 첫아들을 얻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정실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을 보게 했다고 전합니다. 그 아들이 아브라함의 적통을 잇습니다.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정실에게서 태어난 까닭에 첫째가 됩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은 종의 신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까닭에 서자가 되고, 결국 두 모자는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대개 여기까지 기억합니다. 성서 시대 그리고 오늘의 유대인들, 또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여기까지만 기억합니다. 약속의 자식인 이삭이 첫째가 되고 따라서 그 후손이 선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인간적 계획에 따른 자식인 이스마엘은 적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오늘의 유대인과 아랍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선민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반면 내쫓긴 민족은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산입니다. 성서는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것이요 우리의 편견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성서는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또 다른 진실을 전합니다. 유대인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탓에 보지 못했던 진실을 성서는 분명히 전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복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16:1~16, 21:8~21) 그 진실을 증언합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환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으나 아브람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족은 ‘결손’ 상태였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결손이었습니다.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고 희망은 가시화되지 않았습니다. 바라던 바가 이뤄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희망을 확증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찾기 위해 부심합니다. 그 때 선택하는 것은 방법은 대개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법입니다.

도통 희망이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브람과 사래는 초조해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당대 사회에서 아주 익숙한 방법을 찾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뤄주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남편 아브람에게 방법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어정쩡한 아브람은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때가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다고 하니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매우 익숙한 당대의 관습을 따릅니다.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부인이 결혼할 때부터 데리고 온 몸종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때 몸종은 부인의 무릎 위에서 아이를 낳음으로써 그 아이가 주인의 친자식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람과 사래는 그 관습을 채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한 정도를 따르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정당하고 합법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믿는 것처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기자는 당대의 관습을 따르는 그 방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내비칩니다. 아브람과 사래 부부가 궁리 끝에 찾은 방법을 시행한 순간 그 가족은 심각한 갈등관계에 빠지고 맙니다. 사래의 몸종 하갈이 잉태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사래는 그 사태를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사래는 사태 해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남편 아브람에게 항변합니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태도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야말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합니다. ‘당신의 종이니 당신 뜻대로 처분하라’는 태도입니다. 당시 관습에서 여주인의 몸종은 여주인의 권한 안에 있었으므로 아브람의 태도가 그 관습에 비추어 잘못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 골치 아픈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아내에게 떠넘긴 셈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결국 스스로 도망치고 맙니다. 주인의 아기를 가진 여종의 경우 부인으로 대우하지 않더라도 내다 팔거나 쫓아낼 수 없도록 한 것이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쫓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치도록 유도한 셈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또한 인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아브람의 역할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사태를 두고 수수방관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두 여인네 앞에서 아브람은 어찌할 줄 모르는 어정쩡한 가장이었습니다.

사실상 쫓겨난 셈이지만, 도망치는 길을 택한 하갈의 모습은 그 성격이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종이 생존하는 방법은 주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종의 처지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갈은 여주인에게 당하는 굴욕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묘책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스스로 용인할 수 없는 사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 Emanuel Krescenc Liška, 「Hagar and Ishmael in the Desert」 (1883) ⓒWikimediaCommons

도망치던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해법을 제시합니다. 주인에게 돌아가 순종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되돌아갈 것만을 명하지는 않습니다. 하갈과 그 아들을 축복하는 약속을 합니다. 하갈의 하소연을 하나님께서 들었다는 의미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도록 하고 그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합니다.

고통의 울부짖음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곤경에 처한 이들의 고통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적 계획을 따른 자손이라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희생자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주목하고 고통의 호소를 들어 주십니다.

그 고통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하갈은 감격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갈은 하나님을 뵙습니다. 하나님을 뵈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뵈면 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감격합니다. “내가 여기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샘물을 ‘브헬라해로이’, 곧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16:13~14).

무슬림들은 메카 성지순례를 할 때 꼭 행하는 의례가 있습니다. 샘물 주위를 숨가쁘게 왔다갔다 하는 의식입니다. 하갈과 사라가 목말라 했을 때 샘물을 발견하여 목을 축인 일을 환기하는 의식입니다. 그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쫓겨났을 때도 나오는데, 그 장소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이슬람 전통에서는 메카 부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호소 가운데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의 호소를 듣고 그 후손에 대해 축복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그 후손들은 마치 들나귀와 같고 모든 사람과 싸우고 자기 친척을 떠나 살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라비아 사막 지대를 살아가는 베두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서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경멸의 의미보다는 경탄의 의미가 강합니다. 강인한 삶을 살아가는 베두인에 대한 경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굴욕적인 삶을 거부한 어머니 하갈의 삶과 닮았습니다. 천사를 만난 후 하갈은 집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대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복합적인 심경에 빠집니다.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먼저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해를 따라서입니다. 여러 상상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을 넘어 더 멀리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사람들의 계획에 따라 갈등이 발생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그 사태 가운데서 약자의 편에서 문제를 선하게 수습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사람보다 더 멀리 보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이삭이 태어나고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이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더욱 극적으로 재연됩니다. 약간의 먹을거리와 겨우 물 한 부대로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던 모자가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 다시 하나님께서는 그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어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켜,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21:17~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찾게 했다고 전합니다. 내쫓겨 절망의 상황에 빠진 모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목마름을 해결해 줄 생수를 주셨으며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의 이야기와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함께 보면 다소 미묘합니다. 두 이야기는 엇갈리는 두 가지 중요한 동기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선민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쫓겨난 이들의 탄식과 신음을 듣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쫓겨난 이들이 곧 선민으로 동일시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선민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난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스마엘의 하나님을 전하는 본문 말씀은 그 난처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성서 본문이 그 난처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선민을 택하신 것이 그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선민의식이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동일화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잔인한 살육을 감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어찌 해석할까요? 배타적 선민의식 때문에 장벽 너머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현실은 세계 도처에서,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적대와 갈등을 부추기는 일에 동참해서는 안 됩니다.

긴장감을 자아냈던 제22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여러 생각이 엇갈립니다. 다른 언급은 자제하겠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수정당이 괴멸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커다란 숙제를 오히려 더욱 극명하게 환기해 주고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몫이라고 돌려버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적대와 증오를 극복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태를 두고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염려하며 더 멀리 보는 안목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그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안온하게 머무는 사람들에 앞서 그 울타리와 장벽 너머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먼저 들으시는 진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니,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장벽을 쌓기에 급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장벽을 무너뜨리기를 원하신다는 진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진정으로 거듭난 존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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