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죽음의 탐심을 넘어서게 하는 것부활과 사랑(이사야 25,6-8; 요한복음 15-1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4.04.18 03:01
▲ 탐심은 자신의 멸망과 죽음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의 몰락을 가져온다. 이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증명되었다. ⓒGetty Images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아주 넓게 말해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진전되어 왔다면, 그것은 진전을 가로막는 것들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과학과 기술만이 아니라 사회와 삶 그리고 정신과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에 비해 후자에 대해 그렇다고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음에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마치 과거를 잃어버리는 듯한 새로운 형태를 보이지만, 사회와 삶과 정신은 과거 속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기에 과거와 별 차이가 없어 보여서 그렇습니다. 그렇다 해도 새로운 모습을 우리는 살고 있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 미래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과학과 기술이 그 진전의 결과 부딪히고 있는 기후위기는 완화 내지 극복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순전히 과학과 기술의 문제가 아님은 잘 알고 있음에도 과학과 기술은 그에 대한 책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꿈들이 과학과 기술을 통제하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낳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낳을 수 있기를 빕니다.

새로운 시대의 모습은 특히 이사야서에서 자주 그려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산에서 만민을 위해 잔치를 기획하십니다. 갈등하고 분열하고 전쟁하고 살육을 벌이던 나라와 민족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다면 그것이 기적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유엔에서 모든 나라 대표들이 모이는 것을 보지만 그곳은 축제의 자리가 아닙니다. 대표들만 모이는 잔치가 아니라 모두를 모으고 흥겨운 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과연 거기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모이는 사람들은 보자기나 수건 같은 덮개를 얼굴에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벗겨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눈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것입니다. 서로에게서 새로운 얼굴들을 볼 것입니다. 자신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음을 보고 탄성을 지를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와를 보고 탄성을 지른 것처럼 말입니다.

갈등과 다툼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서로 존중하는 사람들을 그 잔치에서 만날 것입니다. 서로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자리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그런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얼굴을 가려 사람을 볼 수 없게 만들고 서로를 비인간으로 만드는 그 덮개들, 그것은 무엇입니까? 땅을 놓고 싸우고 이념을 놓고 싸우고 부를 놓고 싸우는 것이 바로 그 덮개가 하는 일 아닐까요? 그 결과 생명과 생명을 주신 이를 무시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것들이 덮개가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덮개가 무엇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탐심입니다.

탐심의 문제는 십계명이 알려주는 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우리 내부의 힘입니다. 그것은 탐하지 말라는 말로 제어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그 힘의 위험함을 알고 그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수도생활하는 이들이 역사에 끊이지 않았으나 그 자유를 얻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탐심은 그만큼 강력하게 우리에게 붙어있어 마치 우리 자신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탐심이 우리 얼굴 위에 덮개를 씌우고 그 탐심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하게 합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사람들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게 했던 힘입니다.

그런 덮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벗기시기 위해 잔치를 베푸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여시려고 합니다. 그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하시며 다시는 눈물 흘릴 일이 없게 하시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죽음조차도 사람들을 위협할 수 없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눈물과 죽음이 없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 세상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죽음에게 죽음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의 눈물을 흘릴 일이 없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단지 꿈이 아니기를 빕니다. 모든 민족들이 모여 기쁨의 잔치를 여는 날들이 오기를 빕니다.

그 출발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십니다. 그 때 두 번은 아가파오로 물으시고 세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필레오로 답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를 너무 심각하게 구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가파오 역시 비교를 허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는 일은 같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에 대한 사랑이 그의 양을 치고 먹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양이란 말을 기독교인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말입니다. 양을 치고 먹이라는 것은 양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베드로 자신의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내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양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으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랑은 구분은 되어도 하나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만민 잔치의 꿈을 실현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죽음이 죽었듯이 만민에 대한 그의 사랑이 이제 그의 사람들을 통해 펼쳐나갈 것입니다. 모두의 눈을 덮고 있던 탐심의 덮개가 그 사랑으로 벗겨질 것입니다.

죽음의 죽음과 만민잔치의 시작을 주님께서 이렇게 열어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그 일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사랑으로 갈등과 다툼과 눈물과 고통의 세상을 대동잔치의 세상으로 바꾸어가는 길 위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물음에 그렇습니다 대답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할 수 있는 일의 크기가 작다고 한숨 쉬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도 사랑으로 가꿀 때 주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피어나기를 빕니다. 선거로 새로운 사월을 열어주신 주님의 인내와 사랑이 우리에게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기 목사(백합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