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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 가운데로의 초대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장애인을 부르시는 야웨 하나님(미가서 4,6-7)
이정훈 | 승인 2024.04.19 03:39
▲ 장애인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야웨께서 세우실 새로운 이스라엘에서 장애인은 더 이상 주변부에 위치하지 않는다. ⓒ남기평
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한 자를 모아 7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설교자 개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독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합니다. 저는 72년생이고 부산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라고 하는 산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누님만 네 분이었는데, 아들이 태어났으니 조부님도 부모님도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런데 첫 돐이 지나고 아이가 열이 오르더니 걷지 못했고 놀란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용하다는 민간 요법은 다 해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다 소용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6살 때까지 손은 제가 발과 다름없이 온 동네를 기어다니다 싶이 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재미있다는 말은 좀 그렇지만 72년생 이후로는 소아마비 장애인이 없습니다. 73년생은 소아마비 장애인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냐 하면 72년까지는 소아마비 백신은 돈을 내고 접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73년부터 소아마비 백신이 무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73년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 중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사례입니다.

한 가지 웃지 못할 사실은 부모님께서 저희 누님 네 분은 모두 돈을 내고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했지만, 제 아버지께서 ‘누나들도 다 괜찮았는데 안 맞아도 돼’라고 하시면 저에게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님께서 직접 해주신 이야기이니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이게 평생의 한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2008년에 돌아가셨는데, 종종 이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어린 나이니 장애인이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내 친구들과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즈음에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니는 몸이 불편하니 인문계 가지 말고 공고 가서 기술 익혀, 그래야 먹고 살아. 구두닦는 거라도 배워.” 하셨습니다. 저 말씀을 듣고 “왜?” 하는 생각과 오기와 반항기가 올라왔고, 그 이후로 내내 반항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인문계로 진학했고 대학에 대학원까지 공부하며 책과 글 속에서만 살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저 말씀은 장애인 자녀를 걱정하던 마음이셨는데, 왜 그 때는 그렇게 서운했을까 하는 생각에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정말 어머님 말씀처럼 차라리 기술을 배웠으면 지금과는 다르게 더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니 이건 그저 상상일 뿐입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장애인의 삶이 녹녹치 않았기에 드는 감정일 것 같습니다. 여느 사람처럼 산다는 것이 장애인에게는 버거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연도는 가물가물 한데요, 대충 7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단체로부터 몇 번의 강의를 부탁 받고 집을 귀가하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아이구, 몸도 불편한데 혼자 잘 다니네. 그래도 불편한데 집에 있지.”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그 할머니께서 결코 나쁜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저런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어르신의 생각 속에는 장애인이 돌아다니기에는 아직 우리 사회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네, 실제로도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 집 밖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여전히 많이 불편합니다.

하여간 제 어머님이나 그 어르신의 심정이 성서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장애인의 삶을 딱 한정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로 느껴지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동일한 성서 구절을 다르게 읽으면 어머님이나 그 어르신의 걱정과 똑같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레위기 21,17-23의 말씀들입니다. 즉 아론의 후손인 레위인들 중 몸에 장애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제사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22에는 “그는 그의 하나님의 음식이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라고 되어 있어, 어떻게 읽으면 생계를 보장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왜 장애인 제사장들이 제의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 답은 출애굽기 27장에 제사장들이 수행해야 할 제사에 쓰일 번제단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참조하면 번제단의 크기는 길이는 가로와 세로가 2.25m이고, 높이는 1.35m입니다.

그러니 제단에 접근하기 위해 몇 개의 계단이 있었고 장애인 제사장은 그 제단에 접근하는 것 자체에 많은 제약이 뒤따릅니다. 여기에 각종 제사를 위해 제사장이 수행해야 할 동작들을 살펴보면 제사를 드리게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 등의 동물 제물이나 곡식 등을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은 동물들을 직접 잡고 피를 뿌려야 합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요제 같은 경우는 충분히 흔들고 나서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이러니 장애를 가진 제사장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듭니다. 하지만 제사장이라는 직분 자체가 이러한 제사들을 수행하고 남는 동물이나 식물들로 삶을 살아야 하니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생계 자체가 막막해지는 상황입니다. 레위기 21,22은 이런 장애인 제사장들을 돌보라는 규정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느껴지는 대표적인 구절들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말씀이 사무엘하 5,8입니다.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후 설명도 없이 다윗의 마음에 장애인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하여간 사정이 이러니 매년 연례행사처럼 성서를 뒤적거려 보지만 한숨만 늘어갑니다. 그렇다고 장애인과는 전혀 상관 없는 성서 구절을 택해 성서 본문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건 설교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리조리 잘 피해 성서 본문을 선택하고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내 설교문을 작성하고 설교를 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나마 장애인을 보호하자거나 불쌍한 사람 취급하지 않고, 소위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한 모습 속에서 장애인을 그리고 있어 마음이 편합니다. 먼저 미가서는 12예언서 중 순서상으로 6번째 책입니다. 그리고 미가라는 예언자는 남왕국 유다 출신이었습니다.

늘 그렇지만 분량상 다른 짧은 성서 책들처럼 자주 무시 당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이 미가서의 특정 구절에 익숙하지만 그 말씀이 미가서에 등장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4,3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나 5,2의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는 말씀들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야훼]와 같은 분이 누구인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1을 보면 예언자 미가의 활동 시기가 세 명의 유다 왕의 통치 기간과 연관되어 등장합니다. 요담(기원전 742-735), 아하스(735-715), 히스기야(715-687) 등의 왕들입니다. 대충 이 유다 왕들의 통치 시기를 헤아려 보면 기원전 742년부터 687년까지이고 대략 55년 동안이나 활동한 셈입니다.

하여간 예언자 미가가 활동했던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 속해져 있던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큰 전환의 시기였습니다. 8세기 전반에는 고대 근동의 강대국들이 다른 문제에 몰두해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앗시리아에서 티글랏-빌레셀 3세가 집권한 746년 이후 상황은 매우 급변했습니다.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짧고 실패한 왕권이 계속되고, 이 과정에서 무모한 반란의 시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도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게 멸망 당합니다.

이에 반해 남왕국 유다는 비슷한 운명을 피하기는 했지만 앗시리아에게 막대한 조공을 받쳐야 했고, 독립 국가의 지위는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배 국가의 종교적 관습이 들어오면서 이스라엘 전통이 사라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이 이미 쇠퇴하고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큰 변화의 시기에 예언자 미가는 유다 왕국과 백성이 직면한 중대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신학적 해석을 제공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미가는 일반 백성들의 상황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쫓겨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고,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예언자 미가가 통치자들, 상인들, 거짓 예언자들을 비난한 내용에서 당시 백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가와 동시대인 이사야서의 5장과 10장 말씀을 살펴보면 부자와 권력자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취약 계층을 착취하고 부와 영향력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회가 그려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은 이방 제국의 위협을 막기 위한 군비 증강과 요새 건축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역대하 32장). 여기에 앗시리아가 속국들에게 요구한 공물도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앗시리아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재물은 누군가의 주머니로부터 나와야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 몫보다 더 많은 돈을 받쳐야 했습니다. 또한 이 무렵 예루살렘은 사마리아 멸망 이후 대규모 북왕국 백성들이 내려와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했습니다. 예전 7-80년대 먹고 살기 막막한 시골을 떠나 서울 외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삶의 질이 말도 안 되게 낮았던 것과 똑같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이 속해져 있는 문맥인 미가서의 4장과 5장은 희망의 단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4,1-5까지는 심판 이후에 있을, 이른바 종말에 때 벌어질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이 모든 산 위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질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아 멸망했던 이전 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법이 들려질 것이기에 이스라엘은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소위 우주적 평화의 도래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4,3과 4에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라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3절은 모두가 잘 아는데, 또 4절은 잘 모릅니다.

하여간 이 두 구절의 배열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3절이 국가 간 혹은 공동체 간의 갈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4절은 공동체 내의 무너진 균형이 회복된다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둘 모두가 실현될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 평화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집단 간의 충돌이 없다고 평화가 도래한 것도 아니오, 각자의 배가 부르다고 평화가 완성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평화의 두 축입니다.

미가의 희망 선포는 이제 우주에서 앗시리아로 끌려간 포로민들에게로 초점이 이동합니다. 신기한 점은 그 포로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람들의 유형입니다. 첫 번째는 “저는 자”입니다. 두 번째는 “쫓겨난 자”이고, 세 번째는 야훼 하나님께서 “환난 받게한 자”입니다. 모든 유형을 살펴보면 좋겠지만, 오늘 성격에 맞게 “저는 자”만 한정지어 보겠습니다.

저는 자의 히브리어는 צֵלָע(쩰라)입니다. 이 단어가 이 부분에서는 분사 행태로 쓰여 사람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보행할 때 저는 모습을 명사화시킨 단어입니다. 예전에 장애인을 비하하는 지도 모르고 자주 쓰던 절뚝발이 혹은 절름발이라고 하면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신체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가 이스라엘의 포로기와 포로 후기 시대인 페르시아 시대라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즉 고대 근동의 두 제국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연이어 침략하면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교도 되지 않는 군사력을 가진 제국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특히 성서학자들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주로 고위층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런 신체 장애인은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남겨진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전쟁 부상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에스라-느헤이먀서에서 잘 드러나지만 포로에서 귀환 후인 페르시아 시대까지도 이스라엘 사회는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곳곳에 갈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장애인 출현률이 높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으로 인해 장애인 되었고, 전쟁 후에는 초토화된 사회에서 의식주의 문제로 불안한 사회에서 장애 아동은 계속해서 출생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께서 이 신체 장애인들을 “모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불러 모은다는 행위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한 곳으로 부른다는 행위입니다. 그럼 왜 이 신체 장애인들이 흩어져 있을까요.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이든 전쟁 후 사회적 불안정으로 인해 태어난 장애아동이든 아마 그 사회 한 가운데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인은 숨어 지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게 사회의 가장 자리로 밀려 있던 장애인들을 이스라엘 사회 한 복판으로 불러 모으고 야훼 하나님을 떠나 전쟁으로 무너진 새 이스라엘의 주축이 되게 하는 일을 야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7에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선포하시는 부분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남은 백성” 혹은 “남은 자”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끝까지 야훼 신앙을 지킨 구원 받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구원 받을 백성이 바로 신체 장애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전후 문맥을 살펴봐도 이들이 야훼 신앙을 떠나지 않고 신앙을 잘 지켰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이 뜬금 없어 보이는 선포는 무엇인가 사리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도대체 왜 야훼 하나님은 이 신체 장애인들이 남은 자, 구원 받을 자들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일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부분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아 온갖 주석들을 다 펼쳐 놓고 읽어봤지만 이것을 해결해 준 주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성서학자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그저 저의 상상력입니다.

저는 야훼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야훼의 새로운 이스라엘은 사람이 가진 어떤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소위 잘난 사람들로만 채워질 사회가 아닙니다. 신체 어떠하든 그 사회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체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않을 사회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사회 한복판에 있는 사회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장애인은 이동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고, 그러한 장애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서울인권영화제는 서울시에서 지원을 끊어 버리는 야만의 사회입니다. 또한 장애인은 우리 사회 한자리가 아니라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지내야 국가 재정에 효율성이 극대화된다고 보건복지부 공무원이 인정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몸으로써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저는 배웠습니다. 아니 저만 그렇게 배운 것은 아닙니다. 성서를 읽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삽니다. 그걸 교회가 집단적으로 앞장서서 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길 원하는 우리가 장애인을 사회 한복판으로 불러 모으는 일에 적극 나서야할 것입니다. 이에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그리고 그 일에 주께서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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