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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치고 일어나다‘예수, 생명의 치유자’ 3(마가복음 2:4-5)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4.23 04:15
▲ James Tissot, 「The Palsied Man Let Down Through the Roof」 (circa 1894) ⓒGetty Images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 생명의 치유자’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떨치고 일어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성경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감정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이나 생각처럼 변화무쌍한 게 또 어디 있습니까? 상황과 맥락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이 그것입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이렇게 일시적인 상태 변화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집안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질과 방향을 결정하는 마음자리, 우리 행동의 동기를 결정하는 마음자리의 변화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은 ‘내게 이익이 되는가?,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사로잡힌 마음은 ‘무엇을 줄 것인가?, 어떤 필요를 채워줄 것인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부터 사랑에 사로잡힌 마음으로의 변화가 바로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의 한 예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은총과 임재의 빛을 통해 나타난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분의 가르침을 통한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날 중풍병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 주인공입니다.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셨을 때 많은 병자들이 시몬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는 사실을 환기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전이나 회당에서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들이 거주하는 집에서도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임재와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하는 심령, 주님을 애타고 찾고 구하는 심령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는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심령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나올 자격을 따져 물었습니다. 그 자격의 핵심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율법의 감시와 처벌 속에서 깊은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안식일이며 각종 절기들을 제대로 지키겠어요? 희생제물 구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전을 찾고 속죄제사를 드리겠어요? 그러니 좌절을 경할할 수밖에요.

그들 중 상당수가 죄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찍기를 당했습니다. 이때의 죄인은 형법상의 죄인을 말합니다. 자신을 하나님 취급하는 근원적인 자기 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고백이 이닙니디. 이렇게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의 내면의 밑바닥에는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졌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본주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격을 따져 묻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을 따집니까? 경제적 능력을 따집니다. 물질적 가치와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 능력을 묻습니다. 우리 사회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경제시스템의 감시와 처벌 속에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무능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낙인찍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 내면의 밑바닥에는 ‘나는 무가치한 존재야, 나는 루저야’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율법 준수와 관련해 자격을 묻는 유대 사회에선 나는 경건한 의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 성공한 사람들은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저 가면을 잘 쓰고 다녔을 뿐입니다. 그들은 사실 겉으로만 경건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심령에 진정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대적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경제적 자격을 묻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선 나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학벌, 자격증, 이력, 경력 등 소위 말하는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어떤 영역에서 실제로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성과를 올렸느냐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이런 스펙 역시 가면에 불과합니다. 스펙은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이렇게 가면에 의지하고 나 자신을 가면과 동일시하는 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기뻐하시는 진정한 나를 상실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끊임없이 이렇게 자격을 따지는 사회에 순응하며 산다는 것은 사회적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평가를 꼬리표처럼 늘 붙이고 다닙니다. 심지어는 사회적 평가를 곧 자기와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지,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위축시키는지,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초라하고 비참하게 하는지,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지금 매일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 중 상당수가 지금도 무가치함과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패배의식에 젖어 있습니다. 잠시라도 그 고통을 잊고 싶어 순간적 쾌락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회적 평가가 항상 그들 내면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중풍병자도 이렇게 사회적 감시와 처벌, 사회적 낙인찍기, 사회적 평가가 그 내면을 장악하여 지독한 무기력에 사로잡힌 채 삶이 마비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무기력은 자발성과 의욕의 상실을 뜻합니다. 무기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뭔가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그저 불안과 두려움에 쫓겨서 강박적으로 행할 뿐,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인식과 지향, 소명에 대한 인식과 지향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내 소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감지할 감각이 상실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저 이 사회에 자기를 맞추는 행동을 취할 뿐 고유하고 존귀한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동은 취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희망을 찾고 변화를 시도하는 행동,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행동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삶이 마비된 사람은 슬픔과 우울과 불안과 분노에 잠식당한 채 이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삶이 마비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교제하는 일을 꺼려 합니다. 본문의 중풍병자가 그랬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물론 그 스스로 나온 게 아닙니다. 스스로 올 수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온 것은 자기 결정이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누군지 모를 네 사람이 그가 누운 침상을 직접 메어 들고 예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중풍병자를 향한 그들의 시선과 마음이 주변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랐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향해 아마 이런 생각을 품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어. 이 사람도 우리들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야. 누구도 이 사람을 함부로 대해선 안돼.’

때로 우리도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해법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라.” 우리가 한걸음도 내딜 수 없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걸음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보내주십니다.

네 사람이 이 중풍병자를 돕기 위해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장애에 부딪힙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곳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가로막은 이 무리들은 어쩌면 비판과 감시와 처벌의 시선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율법 준수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정죄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 집단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전수하고 율법을 해석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반 백성들의 행위와 삶을 율법에 근거해 평가하고 처벌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했습니다. 율법을 일종의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중풍병자를 가로막은 무리들은 갖가지 구별짓기로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적 통념을 상징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무리들로 가로막히자 네 사람은 어떤 전략을 취했습니까? 그들은 그 집의 지붕을 뚫었습니다. 지붕을 뚫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직접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탁월한 지혜이자 과감한 선택이었습니다. 중풍병자를 향한 이 네 사람의 자비의 마음이 깊고 간절했기 때문에 나타난 지혜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탁월한 지혜를 드러낼 때는 마땅히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할 때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집착해 있을 때는 그저 속임수와 편의주의와 얄팍한 전략만 생각날 뿐입니다.

비슷한 예를 마가복음 7장 24절 이하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 앞에 엎드려 귀신 들린 자기 딸의 치유를 간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매우 모욕적인 말로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개 취급하는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었으면 그 앞에 침을 뱉고 돌아설 법도 한데, 오히려 이 여인은 매우 지혜로운 말로 예수님께 응대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존심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만큼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나타난 탁월한 지혜였습니다.

중풍병자의 침상을 메고 온 네 사람도 자비의 마음이 자아낸 지혜로 지붕을 뚫었습니다. 지붕을 뚫고 침상을 달아 예수님 계신 곳으로 곧장 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들이 사회적 해법이 아니라 하늘의 해법, 영적 해법을 취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회적 감시와 평가의 시선에 짓눌려 무기력에 사로잡혀 삶이 마비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자기를 달리보고 삶을 달리보는 일입니다. 사회적 평가와 감시의 시선 때문에 내면의 밑바닥에 새겨진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무능하다’는 식의 자아상을 내려놓고,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는 가치 있고 유능한 사람이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썼던 가면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 일입니다.

그렇게 네 사람의 지혜로 중풍병자는 예수님께로 가까이 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중풍병자를 데려 온 네 사람의 믿음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죄인으로 낙인찍기보다 고귀한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사회 체계를 신뢰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이 믿음에 중풍병자도 영향을 받았을 게 분명합니다. ‘나도 날 포기했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지? 이 세상 누구도 나를 좋아할리 없고, 인정해 줄리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예수님은 네 사람이 중풍병자에 미친 이런 선한 영향력을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포하셨습니다. ‘위축되고 움츠러든 사람아, 무기력에 사로잡혀 자발성도 의욕도 잃어버린 사람아, 하나님은 너를 무한히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너는 죄로부터 자유롭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너 자신으로 살아라.’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매우 불편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할 권한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말에 누구는 죄인이 되고 누구는 의인이 됩니다. 서기관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지금 신성모독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생각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서기관들은 참 모순적입니다. 누군가를 죄인이라 낙인찍는 일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면서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죄인이라는 평가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예수님은 ‘너희들이 자의적으로 죄인이라 낙인찍은 사람들을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았다고 말하는 게 뭐가 이상하느냐’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명하는 일보다 쉽고 당연한 일 아니냐’ 지적하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처럼 자격을 따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제 나름의 소명을 따라 아름답고 참된 가치와 의미를 이 사회 속에서 구현해야 할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서기관들이 자행했던 사회적 낙인찍기를 중지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너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누구도 네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시선으로 네 자신을 바라본다면, 누구도 너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다른 누군가가 너를 이 침상에 눕힌 게 아니다. 네 스스로 위축되어 이 침상에 누워 있었을 뿐이다. 이제 이 침상에서 박차고 일어나라. 무기력한 삶을 떨쳐내고 이제 새 삶을 시작해라’ 이런 말씀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자라고 이 사회 속에서 자기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우리의 궁극적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는 이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사회적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생령입니다. 우리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류를 기초로 이 사회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의 폐해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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