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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DNA, 忠과 孝나의 산 나의 강이여 4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 승인 2024.04.24 04:20
▲ 회문산격전지 전적비. 회문산은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였다. ⓒ이해학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 내가 알고 있는 순창은 동남쪽에 채계산이 있고 섬진강이 흐른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 고추장이 순창의 명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최초의 군립공원으로서 관광 붐을 타고 있는 강천산이 있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고, 이태가 쓴 《남부군》을 통해서 회문산이 겪은 민족적인 고뇌와 고통을 알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순창을 더 가까이 할 일도 없었고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순창은 거리적으로 멀고 고향 집이 일찍이 팔려서 고향을 사모하는 노스탤지어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목회와 사회참여에 대한 책임으로 너무 분주하였다.

나의 칠십여 년 생애 속에서 내가 순창을 찾아가 어린 시절을 긍정적으로 회고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순창은 충효(忠孝)의 고장이다. 순창은 고추장처럼 열렬하고 간절하고 뜨겁게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효(孝)의 고장이다. 순창문화원에서 발간한 〈순창의 효열부〉에는 201명의 효부와 열부, 효자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현재 순창군의 인구 대비 138명중 1명이 세상이 기릴만한 효부, 열부, 효자라는 뜻이며 도덕규범 가운데 효(孝)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정신세계에서 최고 가치라는 뜻이다.

순창에는 조상을 모시는 재실이 무려 139개나 있다. 이는 131개의 리에 1개 이상의 조상을 모시는 재실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순창 사람들은 살아계신 부모님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에 대하여서도 여전히 정성스럽게 효도를 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랑스런 순창의 인물〉에 나오는 순창을 대표하는 첫 번째 인물로 꼽히는 위인, 효도와 불사이부(不事二夫)의 정신으로 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열부(烈婦) 이씨(李氏)는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의 효 윤리관을 완성한 최고의 덕인(德人)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순창은 효뿐만 아니라 고추장처럼 뜨겁고 알싸하게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초개처럼 바친 충(忠)의 고장이다. 어디를 가든지 충신열사들의 이야기가 뜨겁게 가슴을 친다.

현재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는 총 15,511명인데 순창 출신의 독립 유공자는 2020년에 발간된 《순창의 민족 독립운동사》에 보면 총 98명이다. 98명 중에 의병활동으로 전투 중에 사망하거나, 교수형을 당하시거나, 옥살이를 하시거나, 자살하신 분이 무려 79명이다. 같은 책에 의하면 독립운동가 훈·포상 수여자가 무려 178명인데 대부분이 의병투쟁에 참여하신 분들이다. 그들은 오직 나라와 임금에 대한 불타는 충성으로 맨 주먹으로 자발적인 의병거사를 도모하였다.

〈자랑스런 순창의 인물〉에 의병 투사로 소개되는 인물이 무려 82명이 나온다. 그들은 청일전쟁 이후 을사보호조약에 항거하는 중기의병과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에 불복한 정미의병들이다. 그들은 국운이 기우는 나라를 건지려는 충성심으로 스스로 거병하였거나 의병에 참여하여 구국의 투지를 불태웠다. 순창 사람으로서 나는 순창에서 일어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들의 활동에 대하여 참으로 무지하였다.

을사의병으로 유명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켜 전투 중에 역부족으로 포로로 대마도에 잡혀가서 조선 선비의 기개로 아사순국(餓死殉國)했다는 사실만 알았다. 충청도에 거주하였던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으로 와서 무성서원에서 거병하였으며 그와 함께 거병한 순창 사람이 양윤숙과 채영찬, 강종회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과 태인의병이 순창을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을 《순창의 민족 독립운동사》와 《순창의 근현대사와 6.25 전사》 통해서 비로소 알았다. 그리고 관찰사 이도재가 보낸 고종의 칙지를 받고 이어서 대동산 아래 전주 남원의 진위대가 숨어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받은 뒤 최익현이 “나는 동족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즉각 해산하라”명하고 압송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릿아릿 아팠다.

순창의 의병은 유생이 중심이 된 태인의병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거의 다 순창 출신으로 나라로부터 은전하나 받아 본 적이 없는 포수와 농부, 상인들이었으나 침략군 일제 맞서서 죽음에 이르도록 혼을 불살랐다. 순창의 충정은 정미의병에서 빛을 발하였다. 의병장 양윤숙, 최산흥, 신보현, 유종여, 양인숙, 채영찬, 김선여, 이성화가 순창 출신으로 주로 순창지역에서 활동하여 순창의 나라 사랑의 혼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순창 출신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의병장에는 순창 유등면 내이리 출신 임세묵, 정사홍, 설성삼이 있었다.

의병장 양윤숙은 1908년 회문산에서 임연호와 함께 ‘통장 및 의격문’을 전라도 각 곳에 붙이고 의병부대원 1,200명을 모집하고 그 중에 120여 명을 선발하여 직속 부대를 만들었다. 그는 1909년 12월 김제에서 체포되어 4월 14일 전주 교도소에서 교수형을 당함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양윤숙은 직속부대와 함께 직접 움직이거나 또는 주요 부하들을 통해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친일파 재산 방화 및 경고, 군자금 모집, 의병 모집, 무기 징집, 총기 구입, 일본 수비대와 경찰서에 관한 정보 수집, 문서작성 및 전달, 순창수비대와 교전, 남원수비대와 교전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의 부하들 중에 체포되어 최고 10년에서 최하 1년의 징역형을 받은 의병이 스무 명이며, 15년의 유형(流刑)에서 교수형을 받거나 옥사를 한 의병이 있고 호송되는 중 도망치다 교살당한 의병도 있었다.

의병장 최산흥은 순창군 구림면 통안리 출신으로 1907년 7월에는 이석용 의진에 검찰직을 맡아서 1908년까지 활동하였으나 임실군에서 일본군과 대 격돌을 벌인 후에 50~60명의 부하를 모아서 독자적인 의진을 만들어서 수비대 및 일본 각 관헌을 습격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1908년 5월에 양윤숙 의진에 참여하여 중군장으로 부하 500~600명을 이끌고 순창과 임실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9년 10월에 구림에서 체포되었고 1910년 4월에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부하들 중에 체포되어 최고 15년에서 최하 1년의 징역형을 받은 의병이 열한 명이며 교수형을 받은 의병이 두 명이고 옥고를 치루는 중에 옥사 한 의병이 두 명이었다.

의병장 신보현은 1908년 음력 1월에 거병하였으며 순창군 쌍치면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신보현은 체포당하지 않고 역사 속에 묻혀서 그의 출신지와 생몰 연대를 모른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전투중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고 유형(流刑)을 받고 교수형을 받고 옥사를 하거나 태형을 맞았었다. 나머지 의진에 속하였던 의병들도 전투 중에 피살되었거나 붙잡혀서 징역을 치렀거나 옥고를 치루는 중에 순국하였다. 순창의 의병들은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초토화되었지만 그들의 충의 정신은 일제 침략기에도 순창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현재 순창 인구 156명 당 한 명 꼴에 해당하는 의병이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순창 사람들이 충효정신으로 무장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들 속에서 3.1 만세시위에 앞장섰던 수많은 애국 청년들을 보았으며 만주의 독립군과 자유시참변에서 죽은 무명의 용사들을 보았다. 광복군과 6.25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청년들을 보았다.

그리고 4.19의거와 5.18에 이르기 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유명무명의 투사와 열사들을 보았다. 나 자신이 애국이라는 거대한 숲의 한 그루의 나무라는 사실이 보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문제로 평생을 고민하며 살아온 나 자신이 그들의 후예라는 사실을 늦게야 깨달았다. 

뒤늦게 순창을 공부하며 순창 땅 여기저기에서 충효라는 원석을 발견하며 비로소 순창인 됨의 의미와 충효를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 생명을 초개처럼 희생하며 부모와 나라와 임금을 사랑하는 순창 사람들의 맹목적인 사랑, 맹목적인 효도와 충성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무조건 봉건적이며 계급적이며 권위적, 비인간적, 남성 중심적이라고 비판했던 조상들의 맹목적인 충효가 아름답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비로소 어머니의 시어머니와 남편에 대한 무한한 인내와 용서, 헌신적인 순종과 사랑 그리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아버지의 할머니를 향한 무조건적인 순종과 아내를 향한 구타의 이중성과 위선이 이해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참으로 지독한 순창의 충효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분들이었다. 그리고 그 원칙과 규범을 자신들에게 가혹하게 적용하며 우직한 희생자와 가해자가 되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무려 칠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야 순창정신과 부모님의 효의 실체를 깨달았다.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끈끈하고 가학적이며 동시에 자학적인 그러면서 초월적이고 몰아적이며 개인을 넘어서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지는 가족 전체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충효 말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 자랑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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