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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의 연대자 욥장애인과 이방인을 위해 일어섰던 사람(욥기 29,14-17)
이정훈 | 승인 2024.04.25 04:09
▲ 욥은 그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의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존재한다. ⓒGetty Images
“14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15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16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17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

지난 해에는 장애인주일이라고 설교를 부탁받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연락이 오고 설교를 부탁하셔서 사실 좀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칠랄레팔랄레 하고 있다고 갑자기 설교하라고 부탁하시니 그때부터 어떤 본문을 해야 하나 싶어 성서 본문을 선택하는데만 반나절 정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성서 본문을 두고 반나절이나 고민했던 것은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서에서 장애인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이 부정적인 늬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는 그 많은 본문들을 피해 어떤 본문을 나눌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반나절의 고민 끝에 떠오른 욥기는 히브리 설화 문학의 정점이라고 알려진 고도의 문학성을 가진 책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일군의 학자들은 욥기에서 역사성을 찾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욥이라는 인물의 역사성도, 욥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그가 주장하는 자신의 삶의 실천도 역사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역사성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욥이 주장하는 내용에만 집중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먼저 이 부분은 여러분이나 제가 아는 말로 하면 ‘라떼는 말이야’ 정도가 됩니다.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술 한 잔 걸치시고 안주 삼아 말씀하시는 ‘내가 예전에는 이랬어’ 하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29장 전체는 욥이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명성과 복, 그리고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29,1-13이 욥의 화려했던 명성과 누렸던 복을 묘사하고 있다면, 특히 14-17은 그의 명성이 어떻게 높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욥은 어려움에 처했던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도왔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향유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언듯 마치 인과응보 같은 냄새를 풍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욥기 앞 부분에서 발생한 사태를 보고 있자면 인과응보와는 확실히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특히 14-17은 욥이 실천한 쩨데카, 즉 정의롭고, 미슈파트, 즉 공평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4은 마치 이 부분 전체의 선언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역한글판은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라고 아주 화려하게 번역했습니다. 반면에 새번역은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라고 번역해 명확하지만 약간 민망하기도 하고 좀 밋밋합니다. 사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개역한글판의 번역이 히브리 원어에 더 가깝습니다.

어쨌든 욥이 과거에 누렸던 명성과 복의 이유를 쩨데카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욥은 자랑 삼아 서글프게 항변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욥이 주장하고 있는 이 정의와 공평, 쩨데카와 미슈파트는 구약성서에서 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되찾아주는 자비로운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른 실천을 가리킵니다. 사회과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재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15-17까지 이 정의와 공평한 삶의 구체적인 실천의 예를 늘어놓습니다. 관심의 초점이 내부에서 사회 지형에서 더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 고아, 비참한 사람들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점은 정의와 공평한 삶의 첫 번째 실천으로 장애인을 위한 권리를 되찾아 주었던 기억을 회상합니다.

앞서 이 본문의 역사성에 대해 명확한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말씀이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면, 적어도 욥의 전승이 문서화 되었을 때, 욥의 수많은 전승들 중에 유독 이 부분을 남겨 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애인이 자신들의 권리로부터 배제당하는 현상을 욥기 편집자들이 목격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당시 사회에서 권리를 빼앗겨 버린 장애인들의 삶을 목격하며 욥기 편집자들은 욥의 전승을 여기에 남겨 두었을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서 사라져버린 소위 noblesse oblige의 삶, 즉 이스라엘 사회 고위층이 실천해야 했던 삶의 전형을 욥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어 보입니다. 앞선 구절들에서 욥기 편집자들은 욥을 그 사회의 고위층으로 그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시각 장애인과 지체 장애인을 예로 든 것은 아마도 욥기 편집자들이 활동했던 사회에 유독 이런 유형의 장애인들이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학계에서 욥의 편집 연대를 포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6세기나 5세기로 잡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욥기 초반부에 등장하는 ‘사탄’이나 ‘천상 회의’ 등을 문제 삼아 고대 근동 문화를 접한 후인 기원전 4세기까지 내려 잡기도 합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이 연대를 단순하게 생각해 본다면 앗시리아와 바벨론과의 연이은 전투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끌려간 후 남겨진 이스라엘 본토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부상자들이 장애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전쟁 후 사회가 불안정하고, 더욱이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장애인 출현율이 높아지는 것은 사회학이 보여주는 결과물이기에,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애인들이 많았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특히 이렇게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소수자들의 권리는 무시 받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정한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한국 사회를 빗대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 사회가 고도의 현대화를 이루던 사이, 우리 사회 소수자들의 권리는 깡그리 무시당했습니다. 노동자들이 그러했고, 여성들이 그러했고, 장애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72년생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장애인 권리’라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서울과는 한참 거리가 먼 부산에서 나고 자랐던 이유가 한몫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더 웃기는 사실은 2002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장애인 권리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습니다. 서구 사회는 이미 우리보다 몇 십년을 앞서 장애인 권리를 이야기했고, 그 당시 이미 서울에서 장애인 권리에 대한 담론이 태동하고 있었지만, 그런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던 저에게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권리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생경함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욥의 서글픈 자랑은 장애인에 대한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 장애인과 지체 장애인을 보호했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하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감상적인 연민에서 출발한 개인적인 도움이 아닙니다.

법정과 더 크게는 사회 내에서 저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기 위해 공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뜻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시각 장애인이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아 주었고, 지체 장애인 역시 보행에 어려움이 없도록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욥은 “사회적 공간을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중심”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권리와 보호의 개념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다릅니다.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당사자가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권리의 연대’입니다. 이에 반해 보호는 장애인이 객체가 되고 이를 보호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보호라는 도식 속에서 객체로 남아 있는 장애인은 주체에게 자비를 호소해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욥의 실천은 보호가 아니라 권리의 보장이었습니다.

이는 말씀드린 것처럼 쩨다카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은 자신의 권리로부터 배제당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권리와 관계된 구약성서의 핵심적인 개념어이기 때문입니다. 두 단어는 늘 같이 붙어다니고, 각 단어가 개별적으로 쓰인 본문 보다 함께 쓰인 본문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정의와 공평의 실천은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현대 이스라엘 랍비들은 미슈파트를 원래 재판관에 의한 판결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정의, 규정, 조례, 법적 권리, 법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언급합니다. 이에 비해 쩨다카는 정의라고 번역되고, 미슈파트의 상위 개념이라고 합니다. 미슈파트가 엄격하고 정확하게 개인에게 주어진 의무라면, 쩨다카는 자비심, 친절함, 관대함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미슈파트가 법률적이라면, 쩨다카는 억압 받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결국 이 단어는 자신의 권리로부터 배제당한 사람들을 위한 법적인 연대이자 마음의 연대입니다. 연대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을 보장해 주는 권리의 연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장애인 수용시설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탈시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실천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제 1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6절에서 생략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노키’(אָנֹכִֽי)입니다. 즉 “나는”이라는 단어가 우리말 번역본에서 생략된 것입니다. 생략된 단어까지 넣어 사역하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버지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의 논쟁을 조사했다.”가 됩니다. 세세한 해석은 뒤로 미뤄두고 이 부분은 욥이 자신의 실천을 굉장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우리말 성서가 생략한 것은 아쉽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버지였다.”라는 문구는 여러 가지 늬앙스로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자면, 실존했을지도 모르는 욥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는 자신이 유일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한글 번역본에서 생략한 ‘아노키’를 고려하면 더욱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조금 더 발전시켜 보자면, 그 수많은 사회 지도층 사람들은 다 뭘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비판이 동시에 따라붙습니다. 한편으로는 욥의 자신의 시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욥기 편집자의 입장에서, 궁핍할 대로 궁핍한 전후 이스라엘 사회에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 줄 사람이 없다는 안타까움이자 비난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 어른이 없는 현상과 똑같습니다.

또한 “그리고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의 논쟁을 조사했다.”고 사역한 이 부분을 어느 학자는 “내가 주장의 진실을 알지 못하면 내가 조사할 것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의역에 가깝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철저하게 조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송사나 언쟁에 휘말려든 한 사회의 이방인들을 위해 욥 자신이 일부러 자원해서 나섰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 가능합니다. 요즘 시대로 하자면 이주노동자를 위해 나선 모양새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17은 상당히 과격해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부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이빨들로부터 내가 먹이를 내던져 버렸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과정에서 그들의 권리를 빼앗았던 불의한 자를 완전히 파괴시켜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빨들로부터 내가 먹이를 내던져 버렸다”는 구절은 불의한 자가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은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모두 되찾아 주었다는 적극적인 실천을 가리킵니다.

이 부분은 마치 사무엘상 17,34-35에서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우겠다고 할 때, 만류하는 사울에게 항변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적어도 욥과 다윗이 똑같아 보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누군가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바꾸자면 권리를 되찾아주는 실천은 자신의 목숨을 건 전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조차도 전쟁입니다.

장애인인 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온갖 사회적 장애물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로의 진입은 애저녁에 포기해야 합니다. 지하철 승하차 때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틈으로 인해 전동휠체어 앞바퀴가 끼어 고꾸라지는 상황은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니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러한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해 달라고 목소리를 내면 그때부터는 또 공권력과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도대체 내 권리는 어디에 짱박혀 있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또한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중증장애인의 경우, 많은 장애인들이 지역사회가 아니라 장애인수용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인이기에 당연히 그런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지역사회에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이런 판단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일까요. 그 판단이 옳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무엇이 보장해 주는 것일까요. 오히려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 아닐까요.

무엇보다 이런 말들과 주장들이 왜 검열당하고 입막음 당해야 할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과는 담벼락 치고 누군가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실천의 현장으로 당장 나가기는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 펍 교우들은 분명히 달라서 좋습니다. 그럼에도 삶을 꾸려가기에 바쁜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앞서 “권리의 연대”라는 저의 어설픈 조어를 말씀드렸습니다. 권리의 연대의 출발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입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선 자리에서 권리를 빼앗긴 이들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됩니다. “이것이 저 사람들의 권리입니다.” 하고 말하자는 뜻입니다.

서글픈 사실이지만, 이 조차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입이 되어주는 것 자체가 검열과 입막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네, 마이크를 빼앗길 때까지 입이 되어줍시다. 그 앞 길에 주께서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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