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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고흐와 산책하기 (37)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4.05.11 14:09
▲ <1886년 봄, 캔버스에 유채, 41.5×32.5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1886년 9~11월, 캔버스에 유채, 46×38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1886~1887년, 겨울, 판자에 유채, 32×24cm, 크뢸러-뮐러 박물관, 오테를로>, <1887년 여름, 캔버스에 유채, 34.9×26.7cm, 디트로이트예술대학, 디트로이트>

빈센트의 그림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그의 <자화상> 몇 점을 시간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대번에 그 변화를 알 수 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이렇게 그림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빈센트는 1886년 파리에서 <자화상>을 처음 그렸다. 1886년의 두 그림 <검은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과 <파이프를 문 자화상>은 신사다운 풍모를 담고 있다. 존 러셀이 그린 <고흐의 초상>(1886)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색감은 어둡고 붓 터치는 전통적이고 묘사는 점잖다. 인상파다운 터치가 없지 않으나 드러나기를 꺼리는 듯 수줍어 보인다. 그런데 1886~1887년 겨울에 그린 <자화상>은 앞의 그림과 확연히 다르다. 1887년 여름에 그린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에서는 더욱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빈센트만의 자유롭고 독특한 붓 터치가 시작되었다.

이런 변화의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빈센트는  27살,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결심하였다.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헤이그와 드렌터, 뉘넌, 안트베르펜을 거쳐 파리에 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 헌신하였다. 파리에는 코르몽 같은 좋은 선생도 있었고 동료들도 있어 배움과 경쟁이 가능했다. 파리에 2년을 머물면서 그는 전과는 전혀 다른 화가의 반열에 이르고 있었다.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에 시대는 더뎠으나 빈센트는 개의치않고 자기의 길을 걸었다. 그의 강한 개성이 기특하고 자신감이 대견하다.

빈센트의 자화상을 보면 왠지 모르게 슬프다. 시인 윤동주는 <자화상>에서 ‘산모퉁이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서 가만히 들여다’ 볼 때 우물 속에서 마주친 사나이, 그가 밉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고 했다. 미워서 발길을 돌려 가다가 가엽고 그리워서 다시 되돌아 우물 속 사나이를 찾는 시인의 마음이 애잔하다. 빈센트도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대하면서 그랬을까? 가수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고흐를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사나이’라며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빈센트의 자화상에는 우울과 열정과 체념과 집념이 결집되어 있어 보인다. 마치 다이아몬드의 결정체처럼 빈센트의 자화상에는 그만의 특질과 개성이 담겨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의 생명력이다.

본받을 사람은 있으나 굳이 흉내 낼 필요는 없다. 자신 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을 가장 잘한 사람이 바로 빈센트다.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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