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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왕좌에 계신 이가 다스릴 것입니다”(다니엘 7:9-14)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4.05.13 04:11
▲ 종말을 향해 간다는 것은 성숙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Getty Image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이든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참된 평안은 시선이 바깥이 아닌 내면으로 향할 때, 내면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할 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참 생명과 안식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가 자녀에게 또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믿음’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 중에 그 무엇도 ‘믿음’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에 참 생명과 평안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좋은 ‘믿음’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제 김열/백수연 집사님이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사한 집으로 교회에서 드리는 선물을 들고 가서 기도해드리고 왔습니다.

두 분 집사님과 교제를 나눌 때 백수연 집사님이 지역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자신이 성경 통독을 수십 번 하고, 필사를 여러 번 했다는 말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 통독 수십 번 한 게 자신의 자랑이 되고, 성경 필사를 여러 번 한 게 자신의 자랑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그분의 삶만을 봅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믿음’은 성경 필사 노트도 아니고, 성경을 통톡할 때 읽은 너덜너덜해진 성경책도 아닙니다. 그런 노력을 해서 변화된 ‘믿음의 삶’을 다음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된 삶이 있지 않으면, 필사 노트도 성경책도 오히려 자녀나 다음 세대에게는 거부감만 드는 물건이 될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을 믿으며, 말씀과 예배와 기도를 통해 ‘성도’로 변화되는 과정은 오롯이 우리 자신만의 몫은 아닙니다. 왜 우리 자신만의 몫이 아닌지 오늘 나눌 말씀을 통해 자세하게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도에게 거룩한 목표가 생깁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인격,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분을 닮기 원하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 등등. 수많은 찬양 속에 예수님 닮기 원하는 소원의 고백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열망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만,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12)

예수님의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기에 성도는 예수님을 닮을 수 있고,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가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돕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11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단지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끼리 한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 세상에 있는 성도들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건, 아무렇게나 뭉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이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되어, 존재가 변화되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십니다.

이 청원은, 단 한 순간에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이 바뀌는 마술 같은 사건의 부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인도해 주셔서 ‘결국’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예수님의 청원과 성도의 열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결국 예수님의 청원과 성도의 열망을 이루어 가십니다.

마치 애굽에서 고통당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고, 구해달라고 소리쳤을 때 이 고통당하는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원망을 쏟아내는 순간들이 있었음에도 결국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은 완성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성도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는 소망, 예수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은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감옥에 넣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독하고, 무섭고, 어쩌면 폭력적이고,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나쁜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 8:1-3 “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하였다. 3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얼마나 못 된 사람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어떻게 변했습니까? 사도행전 9:20-22 “20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마구 죽이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더 능력을 얻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목표가 달라지니 이제는 자신이 박해하던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삶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처럼 되었습니까? 인격적으로든 무엇으로든 예수님처럼 되었습니까? 바울에 관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6-39a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38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여기서 바울과 심하게 다툰 바나바는 바울에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행전 9:26-28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이 말씀대로라면,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인입니다. 은인. 그런데 바울은 바나바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바나바가 자신의 주장과 다르다고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바나바와 갈라서버립니다. 얼마나 못되었습니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바나바가 바울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이 제자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한 때 친일파였던 사람을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내 동료, 나와 함께 하던 성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던 인간을 바나바가 이제 바울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님을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증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 바나바에게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바울이 옳았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과거 시절을 생각한다면, 마가를 오히려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바나바가 마가의 실수가 있었음에도 그를 받아들이고 전도여행을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의 잘못이 있었음에도 받아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시간이 지나도 바울의 모습은 이런 잘못된 모습 그대로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점점 더 성숙해 갔습니다. 바울과 함께 계신 성령님이 언제나 바울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이 포로된 백성으로서 타국의 왕을 섬기며 본 환상입니다. 여전히 고국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맞게 될지 알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 환상을 통해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의 해석이 오늘 읽은 본문의 뒤에 나옵니다. “27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28a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가장 높은 왕좌에 계신 이가 결국 다스리신다.’가 이 환상의 결론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지라도 결국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완성할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열망,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열망에 실패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실망은 할 수 있겠지만, 성도는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 새벽에 발목을 접질렸습니다. 그동안 접질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너무 아팠습니다. 근육이 놀랐겠거니 싶어서 하루는 참아봤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기에 다음날 오전에 바로 속초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발에 무슨 일이 나도 났겠다 싶은 마음으로 발에 대한 촬영과 검진을 다 한 뒤에 의사 선생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아플 수가 없는데, 특이 케이스인데…” 제가 사진을 봐도 너무나 깨끗했습니다. ‘어쨌든 다행이다. 성도님들이 기도해 주셔서 또 금방 좋아졌나보다.’라는 감사한 마음으로 2층 물리치료실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당연히 전산시스템으로 2층으로 올라가면 알아서 저를 불러주고 물리치료를 해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분이 지나도 제 이름은 불리지 않고 저보다 늦게 온 분들이 치료를 먼저 받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싶어 데스크를 보니 바구니가 하나 올려져있고 그 위에 ‘물리치료증을 이 안에 넣어주세요.’라고 쓰여있지 않겠습니까? 처음 이 병원에 간 저로서는 알 리가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데스크로 가서 큰 소리로 “아니, 1층에서도 안내를 해주지 않고, 2층에서도 안내를 해주지 않으면 이걸 어떻게 압니까?”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대기 좌석에 앉아서 ‘와!, 허 참나!, 와! 이건 아니지!’ 올라오는 화와 짜증스런 목소리로 냈습니다. 옆에 계신 아주머니도 “일을 똑바로 해야지!”라고 거들어 주시니 더 힘을 얻어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물리치료를 받으며 화를 내고 짜증을 낸 저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화를 내고 있을 때, “아니, 초도제일교회 목사님 아니세요?”라고 물었다면 정말 창피했을 것입니다. ‘다르게 반응할 수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 실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을 성숙하게 하신 성령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어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상중 목사를 포기하지 않고 성숙한 성도로 또한 하나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결국 변하게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을 수 있고,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왕좌에 계신 이, 지극히 높으신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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