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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으로부터 창조는 성경이 말하고 있다‘지구 나이 6000년설’을 비판하면 징계 대상인가, 박영식 교수를 둘러싼 쟁점과 창세기의 창조신앙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 승인 2024.05.14 03:22
▲ 현대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우주의 창조 이론과 비교해 창조과학은 함량 미달이다. ⓒGetty Images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의 <창조의 신학>에 대한 또 다른 비판과 논란 중 하나는 박 교수가 ‘무로부터 창조’라는 정통교리를 부정하고 ‘혼돈으로부터 창조’를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돈으로부터 창조’는 창세기 첫 부분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1-2)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들은 본문에 대한 주석을 통해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와 창조 이후의 ‘질서와 충만과 광명’의 상태와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혼돈으로부터 창조’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본문이 언제 어떤 시대적 종교적 배경에 기록되어 전승되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역사학자나 성서학자들의 도움 없이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따로 신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이러한 설명을 들어 볼 수도 없고, 이러한 설명이 아주 생소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첫 부분은 언제 쓰였을까요? 여러 내재적 정황으로 보아 바벨론 포로기를 반영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전후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그들의 처지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렘 4:23)라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황이 포로기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삶이 비록 ‘혼돈과 공허와 흑암’ 자체이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포로민들에게도 ‘새로운 질서와 충만과 광명’을 주실 것이라는 창조신앙을 직관적으로 고백한 것이 창세기 1장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월터 브루그만은 창조 이야기는 약소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의 식민지 포로민으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생명의 위협을 반영한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첫 부분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정착촌을 벗어날 수 없는 거류민의 신세가 되었으며, 강대국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민족적 차별을 당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 축복하신 말씀(창 1:28)의 의미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생육하라 : 더 이상 약소민족이 되지 않을 것이다.
번성하라 : 더 이상 패망하지 않을 것이다.
온 땅에 퍼지라 : 더 이상 유폐된 거류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복하라 : 더 이상 억압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스려라 :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구약성서학자들은 창세기의 경우 창조 이전의 상태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와 달리 동시대의 많은 창조신화는 대부분 ‘유로부터의 창조’를 말하고 있을 뿐 창조 이전의 상태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바벨론의 창조신화에는 마르둑 신이 티아맛 신의 시체를 마른 물고기 쪼개듯 쪼개어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인간 이외는 어떤 피조물도 어떤 물질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창조 이전의 상태만 말하고 있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외경 마카베오 2서의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7:28)는 말씀에 근거하여 후대의 가톨릭교회가 후대에 교리화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혼돈으로부터 창조는 ‘창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카베오서의 무로부터 창조는 ‘창조 이전의 물질’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개념은 상호모순 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경(政經)인 창세기에 분명히 기록된 ‘혼돈으로부터 창조’는 구약학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혼돈으로부터 창조’를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신학적 무지와 횡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곳에는 태양·달·화성·수성·목성·금성·토성과 같은 천체를 신으로 숭배하는 일상화된 신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처음으로 달이 7일을 주기로 보름·상현·하현·그믐 순으로 반복하는 것을 관찰하고 달력을 만들면서 일곱 천체의 이름을 붙여 요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천체는 각 요일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바벨론과 로마 시대를 거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요일을 주관하는 일곱 주신(主神)들을 경배하고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일상화된 신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곱 천체는 다만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신으로 숭상할 수 없다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해와 달과 별을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6일간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면서 월요일, 화요일이 아니라 ‘첫째 날’, ‘둘째 날’ 식으로 고쳐 부르고 순서를 바꾸어 일요일은 일곱째 날은 삼고 하나님의 안식일로 고쳐 부른 것입니다. 바벨론의 신화적인 세계관을 전면 거부한 혁명적 대안을 계승하여 지금도 유대인들은 첫째 날, 둘째 날로 부른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을 신으로 숭배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해치기도 하고 생사화복의 운명도 주관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낮에는 해,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시 121:5-6)는 말씀처럼 창세기는 피조물에 불과한 해와 달과 별을 더 이상 숭배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신앙의 의미를 하비 콕스는 ‘자연의 비신성화와 비마성화’라고 합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창조의 과학적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포로민의 처지에서 창조 신앙의 의미를 고백한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는 인간 창조 이야기 역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 알게 된 <에누마 엘리쉬>라는 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862년에 영국의 조지 스미스가 번역한 <에누마 엘리쉬> 여섯째 서판에는 신들의 왕 마르둑이 “사람을 만들어 (하급) 신들의 노역을 감당시키고 그들을 쉬게 합시다.”고 한 기록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바벨론 신화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바벨(Babel)-바이블(Bible)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에누마 엘리쉬>와 창세기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둘 사이의 형식적 유사성이 있지만 본질적 내용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신화에는 상급신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 반면에 자신들만 노동을 담당하는 것에 불만을 품어온 하급신들이 소란을 일으키자, 반역자 킨구(Kinngu)의 피와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여 하급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게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포로민들의 강제노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배 이데올로기로 각색된 바벨론 신화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인간은 하급신들의 강제 노역을 대신하기 위하여 반역자의 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기로 창조되어 강제노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한 이사야는 바벨론의 폭군이 꼬꾸라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노동에서 벗어나서 안식하게 하실 때 너희는 바벨론 왕을 조롱하는 이런 노래를 부를 것이다”(사 14:3-4 표준새번역)고 하였습니다. 이를 반영하여 창세기에는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다”(창 2:2)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는 노예에게는 휴일이 없었습니다. 성서는 처음으로 일주일의 하루는 무조건 쉬게 하는 노동금지일을 정했습니다. 이 안식일 정신에서 안식년과 희년 사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신화가 발굴되기 전에 살았던 루터와 칼빈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동설과 진화론 이상으로 바벨론 신화의 등장은 성경 이해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처럼 창세기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과학적 사실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가 바벨론 포로민이었던 당시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바벨론 신화처럼 어떤 자연현상이나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포로 생활과 같은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과 공허와 암흑에 벗어나도록 생명의 새 질서를 창조하신 분이며, 인간은 강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으나 ‘다시는 노예처럼 강제노동을 당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지 말라’는 믿음을 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폰 라트는 “창세기는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롤랑 바르트가 <현대의 신화>에서 제시한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는 조작된 신화 속에 숨겨져 있는 바벨론 제국종교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파악하고 이를 탈신화화 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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