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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 때수동적 능동의 나(열왕기상 8,54-61; 고린도전서 15,10)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4.05.16 04:27
▲ David Martin, 「King Solomon Prays at the Dedication」 ⓒGetty Images

우리는 자주 참된 나 또는 자아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찾아야 하는 것이고 도달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그 말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미리 정해져 있고 현재의 나는 그것과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을 찾아야만 하는 나이기에 나는 언제나 나 아닌 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중요하기에 그러한 물음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물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고 만들어져가는 것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런 물음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실임에도 자주 잊혀지고 사람들은 아무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생물학적이나 사회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연과 순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타자의 도움이나 협력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타자를 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한층 더 밀고 나아가면 사람은 처음부터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타자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우리는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발견은 타자의 발견과 같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여하튼 다양한 모습의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사람은 살아가고, 그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특정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계들은 우리 안에서 수평적이지 않습니다. 수직적이라고 하면 지나칠 수 있지만 상당한 정도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서열이 다를 것이지만, 적어도 신앙인에게는 그 정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 있으면 신앙이란 관계의 정점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타자로서 궁극의 타자가 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는 장면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후대의 성찰 결과가 솔로몬의 입을 통해 선언됩니다. 성전을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은 성전이 아니라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지키는 삶임을 이 본문은 밝혀줍니다. 성전은 그 삶으로 이끄는 곳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58절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하나님)에게로 기울게 하셔서, 그의 모든 길을 가게 하시며, 그가 우리 조상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정과 법을 지키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법을 지키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지만, 법을 지키는 것도 우리이지만, 그 마음을 법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이 본문은 고백합니다. 우리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작용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로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단이라고 말하며, 결단의 원천과 책임을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본문은 마치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법을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현재 그 수중에 법을 갖고 있지만 그 법과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성전을 봉헌하지만 스스로 그 법을 향할 수 없는,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순된 상황을 이 구절은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그의 법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익의 도구로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 단락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지키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섬길 수는 있지만 그가 요구하는 법은 사양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의 법이 삶을 구속한다고 여겨서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자들은 무엇보다도 권력자들과 부자들일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강력한 권위를 갖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법은 장애물일 수 있고 거추장스러울 것이 분명합니다. 불의와 폭력이 저들의 수단이고 독점적 이익이 저들의 목표이므로 정의와 공의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결과로 평화를 말하는 하나님과 그의 법은 그들과 결코 가까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저들만의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그와 그의 법으로 향하게 하실 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사람들에게서 스스로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작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그(=하나님)에게로 기울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기울고 우리가 그의 법을 지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작용하시고 감동시키시고 행동하게 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동은 온전히 우리의 결단일 수 없고 우리의 현재는 전적으로 우리가 이루어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의 내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깨달음이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성취에 대한 자부심의 지배를 받았던 바울이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의 근원을 하나님의 은총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놀라운 그의 모습과 업적이 하나님이 그에게 섭리하신 결과입니다. 그는 이것을 보았습니다.

양상은 다 다르지만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나이지만 내가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내가 나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작용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수동적인 능동의 나입니다. 나는 의존적인 존재로서 독립적입니다. 하나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에게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깨닫게 하고 내가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들과 화해하고 감사하며 사랑으로 일하는 것에서 나를 실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그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그 삶이 멀어보여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와 계시며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은총 베푸시며 뭇사람들과 관계에서 그 삶을 실현하도록 용기 주실 것입니다. 무수한 관계 속에서 내 삶을 만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동력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이를 깨닫고 감사드리는 우리이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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