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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의 몽마르트르고흐와 산책하기 (38)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4.05.18 02:24
▲ <채석장이 있는 몽마르트르> (1886, 캔버스에 유채, 56×62.5cm,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가 파리에 2년 머물렀던 몽마르트르는 해발 130미터의 얕은 언덕이다. 파리 주변 100km 안에는 산이 없다. 그래서 몽마르트르에 서면 파리가 한눈에 내려 보인다. 몽마르트르란 Mont(산)과 Martyre(순교자)의 합성어로 ‘순교자의 산’이란 뜻이다. 3세기 무렵 생드니가 두 전도자와 함께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당했는데 그는 잘린 자기의 목을 들고 북쪽으로 6km를 걸어가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 최초의 고딕건축물인 생드니성당이 세워져 순례지가 되었다.

지금 몽마르트르에는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섞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파리를 대표하는 고딕양식의 노트르담 대성당 등 다른 성당과는 사뭇 다르다. 이 성당은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이를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징계라 여겨 참회와 속죄를 위하고,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하여 건축가 폴 아바디(1812~1884)가 1876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하였다.

이 건축물에는 민족주의 요소가 강하게 스며있다. 프랑스에 가톨릭을 장려한 용맹 왕 생루이(1214~1270) 동상과 100년 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1412?~1431)의 동상이 있다. 땅의 권세를 가진 생루이의 칼날은 땅을 향하고, 하늘의 권세를 받았던 잔 다르크의 칼날은 하늘을 향해 있다. 빈센트가 이곳에 살 때인 1886~1888년에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그렇다면 사크레쾨르의 건축 장면을 더러 캔버스에 담았을 수도 있을 법한데 찾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아마도 개신교인에 외국인이라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던 몽마르트르는 시내 중심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였다. 이 언덕에는 가난한 예술가와 거리의 여인들이 섞여 살았다. 파리 당국이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퇴폐와 환락의 무질서가 판을 쳤다. 예술이 데카당스와 조우하는 일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고갱, 세잔, 쇠라, 피카소등 화가는 물론 소설가 에밀 졸라, 음악가 쇼팽도 이곳을 거쳤다. 이들 중에는 너무 가난하여 침대가 하나 놓인 방에서 낮과 밤에 서로 교대로 이용한 화가도 있었다고 하니 몽마르트르 환경이 어떠한지 알만 하다. 피카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우울함을 표현한 ‘청색시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몽마르트르는 떠돌이들의 마을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보헤미아에서 15세기 종교개혁에 실패한 후스의 추종자들이 정처 없는 떠돌이 삶에 그 어원이 있지 않은가 싶다. 누구라도 이런 환경에 살면 목적이 흔들리기 쉽다. 거룩과 세속이 혼재하는 장소에서 빈센트는 미술을 오롯이 일구었다. 시대를 탓하고 환경을 핑계하지 않았다.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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