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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사람은 나를 속일지 모르나“환대와 사랑의 공동체”(창세기 18:1-10)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4.05.27 01:47
▲ James Tissot, 「Abraham and the Three Angels」 ⓒthejewishmuseum.org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면, 한 주간이 아닌 짧은 하루 동안에도 나와 나의 주변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경험, 이 경험이 아주 사소할지라도 이 사소한 경험이 그날 하루를 망치게도 하고, 때로는 그 하나의 경험이 한 주간을 힘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얼마나 헛된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날 일은 아무리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래서 늘 힘이 더 들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곤 합니다.

하지만 성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밖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경험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일어난 일을 원망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경험할 것인지 아니면 일어난 일을 통해 다른 메시지를 발견하고 다르게 경험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주 주일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삶과 신앙의 태도는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여야 한다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새벽기도 시간에 사도행전 말씀을 나누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다시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54-60의 본문에서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행전 7:60)라고 기도했습니다. 원망과 저주로 경험하지 않고, 사랑과 용서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경험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이하에 나오는 빌립은 어떻습니까? 성령이 가라는 곳으로 향한 빌립은 많은 악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악한 귀신들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이들과 상대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빌립은 악한 귀신들린 그들을 만났습니다. 만나기만 했습니까? 그들을 긍휼하게 여겼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이런 빌립의 태도와 행동으로 성경은 ‘그 성에 큰 기쁨이 넘쳤다.’라고(사도행전 8:8)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계속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광야에서 에티오피아 관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마침 관리가 이사야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빌립은 이사야의 말씀을 가르쳐서 깨닫게 했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인도로 만나게 된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성경은 기록하기를 에티오피아 관리가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사도행전 8:39b)라고 기록했습니다.

한 주간 새벽기도 시간에 묵상한 이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사는 삶이란, 나라는 존재가 이미 성령의 인도 가운데 있음을 알고, 나에게 다가오는 삶을 통해 관계와 상황을 기쁨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는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 오늘 내가 경험하는 일이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또는 오늘 경험한 일이 기쁨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처음에 말씀드린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 오늘 내가 경험하는 일을 ‘어떻게’ 경험해야 할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아,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그냥 만난 게 아니구나.’, ‘아, 운이 없어서 그런 일을 겪었구나 싶었는데, 그 일을 그냥 겪은 게 아니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가능한 성도라면, 때로 우리 삶에도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인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겪은 일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일을 경험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한참 더운 대낮에 장막 바깥, 장막 가장 앞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 사람 셋이 더운 대낮에 맞은 쪽에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보자 달려나가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서 절하기까지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세기 18:3-5a)

아브라함은 자신이 만난 이들의 출신이나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애써 찾아온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또, 자신을 종이라고도 했습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노동 계급에게 아주 쉽게 열린다. 돈지갑은 더 어렵게 열린다. 가장 어렵게 열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집 문이다.”(1) 어디 내 집 문을 열어주면서 모르는 사람을 초대하고 대접한다는 게 쉽습니까? 평생 하지 않을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행동, 환대를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발 우리 집에서 쉬다가 가시라고 간청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드리면서 처음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18장 1절 첫 문장입니다.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사실 아브라함이 본 나그네 세 명은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님인지 모른 채로, 그저 한낮 무더위에 고생하고 있는 나그네로만 생각하고 환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나그네 세 명을 환대하면서도 나그네들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만남을 모두의 기쁨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나그네로만 알았던 이들은 환대를 받으면서 대뜸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알려주지도 않은 자신의 부인 이름을 호명하며, 어디에 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기 18:10a)

갑자기 아브라함은 주님으로부터 자녀를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다시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다면, 들을 수 없었던 메시지이지 않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막을 그냥 지나가도록 할 수 있었던 나그네는,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본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고, 이 인연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브리서 13: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마태복음 25:35-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된 비유에서 예수님은 의인들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물을 때 임금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라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그를 섬기고 돌보는 믿음의 행위가 바로 나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만나는 사람, 맺는 관계,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이 예수님 비유의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주님을 우리도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들려드린 사도행전의 말씀, 창세기의 말씀, 마태복음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나게 되는 사람들, 경험하게 되는 일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일과 삶의 과정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다면, 지금 만나고 겪는 모든 관계와 상황을 다르게 선택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도제일교회에 부임하고 지난 5년간 딱 한 번, 정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집 문을 열어준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집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길 건너에서 군인 한 명이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간절하게 찾고 있지 않겠습니까?

좀 더 바라보고 있자니 화장실을 찾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화장실을 찾아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집 밖으로 나가 멀리에 있는 군인을 바라보며 “저기요! 저기요! 이리 와요! 여기 화장실!”

그랬더니 그래도 되냐는 말도 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군인이 저를 향해 막 달려오더니 집 화장실로 쏜살같이 들어갔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군인은 화장실을 나서며 아브라함이 들었던 “너의 아내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감사하다며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며 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일을 생각하면 결국 이 일이 나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왔으리라 믿습니다. 또 후에 주님이 ‘그때 나를 찾아주고, 불러주고, 화장실을 이용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성령이 시키는대로’ 사는 믿음의 삶은 내가 만나고, 경험하는 일을 올바른 관계로 또 올바른 상황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좋게좋게 넘어간다거나, 덮어놓고 용서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그러진 것을 바로 펴고, 불의하고 부정의 한 상황을 바로 잡는 관계와 상황 자체가 바로 기쁨입니다.

그러니 내가 맺고 겪는 관계와 상황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음을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상황을 소중히 여기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환대와 사랑을 베푸는 삶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될 것이며 더 큰 복과 은혜로 돌아오게 될 줄 믿습니다.

미주

(1) 김성호 교수, “차별 없는 환대와 사랑의 교회공동체를 위한 제언: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을 중심으로” 발제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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