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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16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4.05.27 02:00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 오늘은 열여섯 번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가 고대를 마치고,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살았던 한 인물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그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어 이름 ‘어거스틴’이 더 잘 알려져 있는데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청년시절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목사님 설교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마니교’라는 이교신앙에 사로잡혔던 그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마침내 회개하고 개종하여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에서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1)(397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4년 뒤인 401년에 완료)을 읽으면서, 그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기도와 회개의 의미를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이야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와 신학의 역사에서 거대한 산맥을 이룬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습니다. 날카로운 신학적 논쟁, 엄청난 분량의 저술활동만이 아니라 열정적인 사목활동으로 우뚝 선 거인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방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교부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신학 전반에 걸친 그의 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 때까지 그와 경쟁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교회의 모든 신학적 관심사를 다루고 교회와 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습니다.(2)

2천년 신학의 역사에서 전환기를 이룬 인물들을 든다면, 초대 교회의 사도 바울, 고대 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중세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현대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 세 사람 모두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 신학적 전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평가가 모두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은 그가 기독교 제국의 어두운 천재라고 합니다.(3) 그가 교회와 국가의 동맹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제기되는 신학적 논쟁을 대화가 아니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해결하려고 한 것은 그 후 국가권력과 교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적대자들이었던 도나투스(Donatus, 313-347)파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해 물리적인 힘의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로마 제국의 군사기술도 동원했습니다.(4)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배교자들을 용서하지 않는 신앙의 순수성을 고집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박해기간에 배교한 신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도나투스파 사람들이 교회를 분리해 나간 것이지요.

▲ Ascanio Luciano, 「The vision of St. Augustine」 (1650) ⓒWikipedia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이 국가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목적, 곧 교회를 위해서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방법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교회의 통일이나 보편적 일치를 위해 사용하는 무력은 필요하고 효과적일 수 있고 또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지요.(5)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 같은 분파주의자들을 박해하고 탄압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했고, 동시에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교회 지도자였습니다.(6)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적대자는 펠라기우스(Pelagius, 360?-418?)였습니다. 영국 최초의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그는 인간은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청년기에 펠라기우스에게 영향을 받아 그의 주장 상당부분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원죄론에 근거하여 인간은 이미 죄 가운데서 태어난다고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거부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인 로마 교회를 압박하기위해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프리카 교회 감독들은 로마 당국에 우수한 누미디안 종마 80마리를 뇌물로 바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받아들이도록 부탁했습니다. 도나투스파를 박해할 때에는 물리적 힘을 사용했는데, 펠라기우스파를 박해하기 위해서는 뇌물을 사용한 것이지요. 순식간에 펠라기우스파들은 교회와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한 사람들로 돌변했고, 영국, 스페인, 시칠리아, 로데스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되었습니다.(7)

그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비판적 혐의들은 주로 그가 인간의 성(性)을 악하다고 본 것, 공공윤리의 세계에 대한 무관심, 권위적인 교회 체제와 하나님의 일치에 대한 지나치게 철학적인 이해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8) 그래서 펠라기우스의 추종자였던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Julianus Eclanum)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고전문화의 증오자이자 선동적인 연설가, 성(性)문제에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9)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생식기를 원죄의 전달수단으로까지 생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중들에게 누구나 몽정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10)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에 대한 이런 부정적 생각은 그 후 기독교인의 성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여, 성이라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죄이고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정적이거나 모두가 긍정적일 수는 없지요. 누구나 삶의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오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 성적으로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오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감독이 된지 2년 후인 397년, 43살의 나이에 그는 《고백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고백록》에 따르면 그는 371년, 17살의 나이에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여인과 동거를 시작했고,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가 청소년 시절 성적으로 방탕하게 살았다거나, 동거녀에게 신실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와 동거한 여인을 진실로 사랑했고, 아들의 출세욕에 눈이 멀어 동거녀와 헤어질 것을 강요한 어머니 모니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을 때까지 신실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11)

게다가 당시 청년의 결혼 전 동거는 지극히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으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금욕적 삶으로 전환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12)

다음 시간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교 신앙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오해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정통 교회를 만나기 전 ‘마니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마니교도 일종의 기독교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마니 기독교에서 암브로시우스 기독교로 이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마니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주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선한용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3).
(2) 후버트 드롭너, 《교부학》, 하성수 역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2001), 515.
(3)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새로운 종교의 탄생》, 김주한 역 (서울: 살림, 2005), 302.
(4)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11.
(5)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13.
(6)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14.
(7)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23.
(8) 로완 윌리엄스,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 유한자의 조건과 무한자의 부르심》, 이민희·김지호 역(서울: 도서출판 100, 2021), 6.
(9)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23.
(10)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24.
(11) 어거스틴, 《고백록》, 201-204 참고.
(12)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천년 동안의 정신 I》, 305.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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