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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했는가? 마니교란 무엇인가?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17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4.06.03 03:48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오늘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에서 자신이 암브로시우스의 정통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 열성적인 ‘마니교’ 신도였다고 고백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청년 시절 거의 9년 동안(1) 깊이 빠져 있었던 ‘마니교’는 어떤 종교였을까요?

창시자 마니(Mani/Manichaeus, 216-276)는 주후 216년,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바빌로니아 주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화가, 예언자로 알려졌습니다. 주후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크게 융성한 마니교는 절정기에는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었고, 곳곳에 마니교 사찰이 세워졌고, 마니가 시리아 아람어로 썼다는 여섯 권의 경전은 그리스어, 곱트어, 라틴어로는 물론, 중세 페르시아어, 중국어(한문)으로도 번역되었다고 하니, 실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하겠습니다.

마니는 마니 이전의 예언자들, 즉 아담과 자라투스트라와 붓다와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 후대의 신봉자들에 의해 타락되고 잘못 해석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그들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원래의 완전한 모습 그대로 가르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불교,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일종의 혼합종교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니가 시리아 아람어를 말하고 글을 썼다는 것은 그가 유대-기독교 전통에 더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시리아 아람어는 당시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내용도 유대교 묵시문학과 세례를 중시했던 기독교 한 분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마니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마니교의 가르침은 여러 종교들을 혼합한 것이긴 하지만, 마니가 유대-기독교 전통에 서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니교 신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마니 기독교’에서 ‘암브로시우스 기독교’로 전향(轉向)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마니’는 누구였고, 마니교는 무엇을 주장했을까요?

오늘은 레바논 출신의 기자이자 작가인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1949- )의 장편소설, 《마니》(2)를 중심으로 마니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986년 처녀작 발표 이후 곧바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아민 말루프는, 사실적인 문체와 신비로운 분위기가 절묘하게 조화된 작품들로 1988년에 프랑스출판협회상, 1993년에 《타니오스의 바위》라는 작품으로 콩쿠르상을 수상했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프랑스 문단에서 그는 ‘영감을 받은 작가’라는 찬사 속에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성취한 드문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장편소설 《마니》는 1991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는데, 원제는 《빛의 정원》이었습니다. 저자는 시리아, 아랍,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에서 발굴된 새로운 자료와 유적들을 힘입어 마니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했는데요, 우리말로는 1996년에 번역되었습니다.

마니는 주후 3세기 절름발이로 태어난 의사이자, 화가, 예언자로 마니교를 창시했고, 마니교는 짧은 시간에 세계 종교가 될 만큼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마니가 직접 썼다는 경전들은 물론 마니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도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극도의 인본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관과 그의 충격적인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본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결탁하여, 강력하게 탄압했기 때문입니다. 마니가 “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고 외친 것이 오히려 모든 종교인들의 미움을 자초한 것이지요.

마니에 대한 이미지가 지극히 부정적으로 왜곡된 것도 그 때문인데요,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오늘에도 언어 속에 남아있습니다. ‘미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매니어’(mania)와 ‘미치광이’를 뜻하는 ‘매니액’(maniac)의 어원도 사실 그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저자 아민 말루프는 중앙아시아의 투르케스탄(중국령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남부), 알제리의 테베사, 이집트의 르파이움에 숨겨져 있던, 마니교의 정통 계승자들에게서 나온 자료들을 중심으로 마리의 용모, 그의 전도 생활과 여정을 재구성합니다.

마니의 역사는 예수가 사망한지 2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216년에 시작됩니다. 마니는 바빌로니아의 주요 도시이자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였던 크테시폰(현재 이라크의 바빌론 근방)에서 태어났습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형성된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는 동서교통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이 동서교역 중계지의 확보 여부에 달려 있어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동방과 서방 간의 격전지였습니다.

당시 크테시폰은 다신 사회였다. 마니의 아버지 파티그는 엑바타나(이란 서부에 있는 도시 하마단의 옛 이름, 메디아 왕국의 수도였다가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 가운데 하나가 되어 여름 궁전으로 이용되었다) 출신이었는데, 전사 계급의 후손이었습니다.(3) 그런데 어느 날 팔미라(시리아 사막의 중앙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항쟁 때 로마 편을 들어 급속히 발전한 도시) 출신의 시따이라는 사람의 방문을 받는데, 그는 금욕적 유대 그리스도인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시따이의 설교에 빠진 파티그는 마니를 임신한 아내 마리암을 홀로 두고 훌쩍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마니는 바빌로니아력으로 537년 니산 월의 여드레째 날인 서기 216년 4월 14일에 태어납니다. 그 때는 파르티아 왕국의 마지막 왕 아르타반이 크테시폰을 통치하고 있었고, 로마에서는 카라칼라 황제가 맹위를 떨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4)

한편 마니의 아버지 파티그는 티그리스 강 서안 종려나무 숲 은거지에서 극단적인 수행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그 공동체는 자신들을 ‘할레 헤와레’라고 명명했는데, 이 말은 흰 옷을 입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아람어로, ‘백의(白衣) 집단’을 의미했습니다.(5) 그들은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고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물가를 거처로 삼아 물에서 순결과 구원을 기대했으며, 세례를 베풀고, 세례 요한과 아담, 나사렛의 예수와 그의 쌍둥이라고 부르는 토마에게 구원을 빌었습니다. 이들은 “기도, 찬송, 의식, 목욕재계와 성수와 영성체 의식, 정결의식을 수행하고, 지도자인 시따이의 주석에 따라 형제들이 직접 사본으로 만든 토마의 복음서, 빌립보의 복음서, 혹은 베드로의 묵시록과 같은 성서를 공부해야 했습니다.”(6)

그런데 어느 날 마니의 아버지 파티그는 공동체의 수장인 시따이의 명에 따라 아들 마니를 데려와야 했고, 마니는 이곳에서 스물네 살이 되기까지 머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7) 태어나면서부터 오른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마니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공동체의 아이로 성장합니다.(8) 어린 나이에 마니는 그들의 법칙을 따라야 했고, 하얀 도포를 입어야 했고, 그들의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들이 기도를 더듬거리면서 흉내 내야 했습니다.

▲ 마니의 인장 (마니의 초상이 각인된 인장, 기원후 3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아마도 이라크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Cabinet des Médailles, Paris) ⓒWikipedia

그러나 그렇게 성장한 마니는 240년 4월, 스물네 살의 나이에 공동체를 떠나,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길 위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합니다. 인도에 도착한 마니는 교회와 시나고그를 방문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이행하러 왔으며, 전 인류에 퍼져 있는 다수의 종교를 흡수해서 그 메시지를 만인의 종교, 즉 세계종교로 완성시키겠다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9)

“사람들은 신에게 수많은 이름을 주고 있는데, 그 이름들은 모두 진짜일 수도 있고, 모두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설사 신에게 어떤 이름이 있다 하더라고, 그 이름은 우리의 문자로 쓰일 수도, 우리의 언어로 발음될 수도 없습니다. 신을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권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나 권력은 인간들을 재는 척도이지 신의 지위를 재는 척도는 아닙니다. 욕망, 두려움, 노여움을 신의 뜻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신이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을 시기하고, 우리의 행동에 기분상해하고, 우리의 말투 하나하나에 마음을 쓴다면서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마니는 전 인류에게 전할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왔습니다. 나는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나자렛인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에게 말했었지요. ‘예수의 말씀을 따르시오. 그리고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여, 전 세계가 무지와 미신 속에 잠겨 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그 가르침 속에 환히 빛나고 있는 빛을 찾으시오. 내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 모든 미움이 끝날 것이오.’”(10)

“나는 어느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인종이나 종족에 속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종교에 속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각기 다른 믿음 속에서, 각기 다른 생각 속에서 껍질을 벗기고 빛을 발하는 물질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노선을 따르는 자는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 그리스도, 붓다 등 누구에게나 구원을 빌 수 있습니다. 내가 세우는 신전에는 누구나 각자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 기도드리러 올 수 있습니다.
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합니다. 그 점이 바로 내가 모든 사람의 눈에 죄인으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내가 나자렛 예수의 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내가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를 악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합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승려들은 내가 조로아스터의 예지를 예찬할 때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내게서 그리스도와 붓다를 저주하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도들을 모집해 놓고서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가르치기 때문이며, 자기들끼리만 유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 마니는 모든 이의 친구로 보이지 않고 모든 이의 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화해시키려고 한 것이 나의 죄라면 물론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를 영벌에 처하기 위해 단결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람들이 각종 의식과 신화, 불행에 지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그들도 위대한 샤부르 왕 시대에 한 겸허한 인간이 전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11)

마니의 메시지는 모든 종교의 통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니는 모든 인종과 계급의 통합을 지향했습니다:

“신의 불꽃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으니, 그 불꽃은 인종이나 계급에 차별을 두지 않으며, 남자나 여자에 대한 차별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아름다운 마음과 분별력으로 그 불꽃을 살려야 불꽃이 환히 빛나게 됩니다. 한 인간이 위대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빛에 달려 있습니다.”(12)

청중들은 모욕당했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속한 인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카스트 계급을 존중했고, 자기보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은 신의 섭리라고 여기면서 계급의 차이를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니와 그 일행은 274년 체포됩니다. 재판은 요식행위였고, 처형이 선언되었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니의 목에는 무거운 쇠사슬이 감겨있었고, 팔다리에도 쇠사슬이 세 겹이나 친친 감겨 있었습니다. 마니는 초소 옆 포석이 깔린 마당의 돌기둥에 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면서 고통을 주기 위해 음식을 주었지만 몸에 감긴 쇠사슬의 무게 때문에 생명은 한 방울씩 떨어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방문객도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구경꾼들의 행렬이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13)

스물여섯째 날 아침, 마니의 수난이 끝나는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회색 머리의 여인들만이 마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밤을 새우고 있었고, 아티마르의 딸이라 불리는 여인이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마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바빌로니아력으로 584년 아다르 월의 넷째 날이었으니, 서기로는 274년 3월 2일 월요일이었고, 마니의 나이 쉰여덟이었습니다.(14)

바흐람 왕은 마니의 묘지가 순례지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의 시신을 자기의 영토에 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시신을 치우기 전에 흰 다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벌거벗긴 채로 사흘 동안 베트라파트의 입구에 매달아 놓게 했습니다. 그가 죽었음을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니의 죽음과 함께 그의 예술과 열정에 대한 저서, 그의 관대한 믿음, 인간과 자연과 신의 화합에 대한 그의 메시지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이후 천 년 동안 울려 퍼졌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아프리카,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발칸반도에서 산발적이고 간헐적으로 유지되었고, 동쪽으로는 인도 북부, 중국 서부와 티베트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마니를 ‘예수의 사도’로 불렀고, 중국에서는 그에게 ‘빛의 붓다’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마니의 희망은 3대양의 연안에서 꽃을 피웠지만,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증오와 원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군주들은 그를 ‘거짓말쟁이 악마’, ‘악이 가득 찬 그릇’, ‘편집광’이라고 했고, 그의 메시지를 ‘천한 신앙’, ‘구역질나는 이교도의 교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니의 저서 및 성화와 함께, 가장 성실했던 제자들, 그리고 마니의 이름을 끝까지 당당하게 숭배했던 여인들을 화형대의 시뻘건 불더미 속에 넣어 불살라 버렸습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니의 사상은 조로아스터교, 불교, 기독교 등의 교의를 수용, 4세기 서방에서 최성기를 맞았고, 6세기 이후에는 동방으로 교세를 뻗쳐 중국에 이르렀습니다. 당대의 중국에서는 마니교 혹은 ‘말니교’라고 하였으며, 측천무후(당나라 제3대 고종의 황후)는 대운사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마니교의 합리주의적 주장과 미적 종교성에 끌린 아우구스티누스가 9년 동안 마니교를 신봉하면서 마니교의 미학서, 《미와 적합》을 저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16) 그리고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을 선과 악의 본질에 대한 견해, 지옥의 개념, 인간을 소명받은 자, 듣는 자, 죄인이라는 세 집단으로 나눈 것, 육체와 성적 행위를 적대시한 것 등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교신앙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할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적 형태의 ‘마니 기독교’에서 ‘암브로시우스의 기독교’로 전향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적 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혼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순수한 복음, 순수한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혼합주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마니교를 떠났을까요. 그 이유를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다음 기회에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주시어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미주

(1)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3), 114.
(2) 아민 말루프, ⟪마니⟫, 이원희 역 (서울: 정신세계가, 1996).
(3) 아민 말루프, ⟪마니⟫, 10.
(4) 아민 말루프, ⟪마니⟫, 27.
(5) 아민 말루프, ⟪마니⟫, 28.
(6) 아민 말루프, ⟪마니⟫, 30.
(7) 아민 말루프, ⟪마니⟫, 87.
(8) 아민 말루프, ⟪마니⟫, 40.
(9) 아민 말루프, ⟪마니⟫, 142.
(10) 아민 말루프, ⟪마니⟫, 187-188.
(11) 아민 말루프, ⟪마니⟫, 189.
(12) 아민 말루프, ⟪마니⟫, 198.
(13) 아민 말루프, ⟪마니⟫, 307.
(14) 아민 말루프, ⟪마니⟫, 315-316.
(15) 아민 말루프, ⟪마니⟫, 318.
(16) 아민 말루프, ⟪마니⟫, 326.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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