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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지는 의사 파업과 질고의 치유자 예수예수 시대의 병자의 4중적 고통
허호익(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 승인 2024.06.04 03:45
▲ 촛불 집회 나선 의사들 ⓒ연합뉴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4월 4일 “의사 파업이 길어지면서 일부 한국인들은 인내심을 잃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의료공백이 대중들의 의사에 대한 존경심을 시험하는 한편, 정부에 대한 분노도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는데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5월 30일 전국 6개 도시에서 열린 의협 촛불집회에서 ‘6월부터 큰 싸움’을 예고한 바 있는 의사협회는 6월 2일 의협 전국 시도의사회장 긴급회의를 열고 “총파업 등 집단행동”의 여부에 관해 회원들의 찬반 투표를 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정부가 강행하려는 의대 정원 2000명 확충의 복잡한 쟁점을 다 정리할 수 없지만, 병자의 치유자로 등장한 의사 예수의 치유 사역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의 첫 번째 공적 활동이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병자를 치유한 기사가 모두 29번 기록되어 있고, 그 병명을 대체로 16가지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천국 복음 선포와 회당에서 가르침과 함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친 것’을 예수의 3대 사역(마 4:23)으로 꼽았습니다.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가 자주 병자를 치유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에 비추어 보면, 예수가 치유자로서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아주 달랐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도 치유 사역을 당부한 것은 당시의 병자들이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시대의 병자는 4중적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약과 의술이 빈약하고 진통제도 없던 시대의 병자들은 신체적 육체적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어쩌다가 넘어져 골절을 당했을 경우 오늘날과 같은 치료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뼈가 튀어나온 그대로 고통을 당하다가 심하면 그 상태로 죽어야만 하였습니다. 질병 자체가 심각한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현대와 달리 사소한 질병에 걸려도 약이나 의학지식이나 치료 기관이 태부족하였기 때문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나을 수 있는 희망도 거의 없었습니다. 병자는 고통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체념과 절망의 정신적 고통을 당하여야 하였습니다.

성한 사람도 먹고 살기 어려웠으므로, 병자들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가족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가출하였습니다. 병자는 무익한 짐이라는 이유로 가정과 사회로부터도 배척받고 추방당하는 사회적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아픈 것도 억울한데 병자들은 불결하고 부정한 자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죄인으로 취급받는 종교적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유대의 성전공동체나 은둔파인 쿰람 공동체는 병자들을 철저히 차별하고 소외시켰습니다. 병과 병마(病魔)는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병자들은 거룩한 성전 출입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소경이든지 절름발이든지 얼굴이 일그러졌든지 사지가 제대로 생기지 않았든지 하여 몸이 성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다리가 부러졌거나 팔이 부러진 사람, 곱추, 난장이, 눈에 백태 낀 자, 옴장이, 종기가 많이 난 사람, 고자는 성소에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레 21:17-20 공동번역)

예루살렘 성전 미문이나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이런 행려병자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황금으로 장식한 성전보다 이들 병자들이 예수의 눈에 밟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간장이 타는 마음으로 그들 가까이 가셔서 온전한 치유를 통해 ‘병든 자의 의사’(마 2:17)로 오신 사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론>에서 건강한 아이만 양육하고 결함이 있는 장애나 병을 지닌 아이는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세네카는 그것이 ‘이성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장애자 차별주의자로 비난받을 주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병자들이 환대받고 치유받는 구원의 원초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의 치유 동기는 메시아적 권능이나 신적 능력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단지 그 당시 가장 고통 받는 자들이 병자인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긴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라는 동사는 ‘스플랑크논(splangchnon)’이라는 명사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이 말은 애, 창자, 내장을 뜻합니다. 예수는 병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애간장이 타는듯한 사랑의 심정’에서 4중적 고통에 시달리는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고 그들을 치유한 것입니다. 

예수는 치유 방법도 치유 목적도 달랐습니다.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병자들의 4중적 질고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병자들에게 “네 죄가 사해졌다”(막 2:5)고 선언합니다. 병자는 죄인으로 취급되었지만 예수는 죄사함의 선포를 통해 병자는 죄인이 아니라, 단지 아픈 자라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병은 죄의 결과라고 굳게 믿는 병자에게 죄의 용서와 치유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서 독일어 하일스(Heils)는 치유와 구원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이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여라”(막 9:34 표준새번역)고 선언했습니다. 병고는 절망 그 자체이므로 치유는 치유를 희망하는 믿음을 통해서 이뤄지는 놀라운 표적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막 9:23 공동번역)고 하였습니다. 치료에 대한 희망을 확신시킴으로써 질병과 질고에 따르는 절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6)고 하니,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예수는 단지 질병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일상생활로 복귀하도록 하여 온전한 사회적 치유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4)고 선언하였습니다. 한 촌에서 한센병 환자 열 명을 치유한 다음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보이고, 더 이상 죄인으로 병든 자로 취급 받지 않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예수는 죄인 취급받는 행려병자들에게 종교적 제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온전히 복귀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고 무지하고 억눌림을 당해온 한(恨)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잘 걸립니다. 이런 사정은 예수 당시에는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속 의학에서는 현대의학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curing a disease)과 믿음으로 질고를 치유하는 것(healing a illness)의 근본적인 차이를 제시합니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현대의 전문의들은 환부와 질병만을 치료할 뿐, 병으로 인한 환자와 그 가족들의 치료비 걱정 등 다중적인 질고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자로서 예수는 현대의 전문의와 달랐습니다. 예수는 다양한 분야로 세분된 질병(disease)의 치료자가 아니라, 질병이 빚어내는 질고(illness)를 포함한 병자의 4중적 고통(pain) 즉, 신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사회적 고통, 종교적 고통 자체를 통전적으로 전인적으로 치유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질고의 치유자였습니다. 그는 ‘질고를 아는 자’였으며,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만 치유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생겨난 온갖 차별의 고통까지도 온전히 치유하는 질고의 치유자였습니다.
 
예수는 무차별적 치유자였습니다. 예수는 비록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모든 병자를 치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만난 모든 병자들을 그 신분이나 계급이나 민족적 차별을 두지 않고 그가 만난 모든 병자들을 차별 없이 치유하여 주었습니다. 예수가 치유한 사람들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와 수로보니게의 여인의 딸), 남자와 여자(혈루증 여인), 어른과 어린이(귀신들린 아이), 주인과 종(가버나움 백부장의 하인)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무상의 치유자였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고 당부하였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으로 사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소수의 의사가 있었지만 부자들만이 그 혜택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나라 의사들의 수입이 다른 모든 직종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이어서 더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를 목표로 입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지방의대 '지역인재전형'만 2천 명이 훌쩍 넘을 것이라고 하니, 지방으로 전학 가려는 초등학교 학부모들도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 의대 정원이 확충되어 수능 1등급 4800명 전원이 의대로 가게 된다면 국가 균형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의대에서는 성형외과나 피부과 등 수입이 많은 쪽으로 전문의 지원이 몰리니, 의대 정원을 늘리고 기피하는 전문 분야에는 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다큐 <어른 김장하>를 보았습니다. 기자가 한의사 김장하 어른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장학사업과 지역 사회를 위한 후원을 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고 물으니, “내가 번 돈은 모두 병자들과 그 가족들의 호주머니에게 나온 것이니, 나만을 위해 사용할 수 없지요”라고 말한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히포클라테스 선서에도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무차별적 치료를 하겠다고 했지만, 가난한 자를 위한 무상의 치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공공의사와 공공병원을 대폭 확충하여 가난한 환자들에게 병원 문턱을 낮추고, 의사들의 무료 의료 지원 사업을 더욱 확충하는 것이, 무상의 치유자 예수의 남다른 정신을 이어가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동연, 2010), 108-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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