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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웅들산은 脈이고 江은 줄기이다 ②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 승인 2024.06.05 03:51
▲ 거창에서 자행되었던 학살 사건에 대한 신문의 보도 ⓒ이해학

순창문화원과 전라북도 문화원 연합회에서 발행한 「순창의 근현대사와 6.25전사」, 순창문화원이 발행한 「순창군 6.25 전사」를 비롯해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바로 인민군 6사단과 국군 11사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순창에서 만난 전쟁 영웅들은 ‘황학소’와 ‘방호산’, 그리고 ‘최덕신’이다.

적성국민학교에서는 해마다 한두 번씩 채계산 토끼몰이에 동원되었다. 전교생이 산을 둘러싸고 아래에서 함성을 지르며 올라가면 토끼들은 위로 도망치기 마련이다. 맨 위에는 고학년생들이 작대기를 들고 토끼를 때려잡는다. 토끼는 선생님들의 술 안줏감이 된다. 분단 조국의 젊은이들도 몰이에 쫓기는 토끼같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독립된 자주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전쟁 영웅들도 마찬가지다.

황학소

학소(學蘇)라는 이름은 소련을 배우자는 뜻이다. 전쟁의 와중에 죽임당하거나 고초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슬프고 공분을 일으키지만, 특별히 순창 학도 의용군과 회문산에 자리 잡았던 전북도당의 탱크 병단 병단장이었던 빨치산 황학소의 이야기는 너무 가슴 아프다.

회문산에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본부를 세운 위원장 방준표는, 남쪽 성미산 앞의 미륵정이 벼랑 일대에는 ‘백암의 벼락 병단’을, 동쪽 여분산 쪽은 ‘번개 병단’과 ‘카츄사 병단’을, 북쪽 희여터는 ‘탱크 병단’을, 서북쪽은 ‘독수리 병단’과 ‘임실 군당 유격대’를 배치하였다. 그중에 희여터를 맡은 탱크 병단의 병단장이 황학소인데 그의 본명은 ‘황의지’였다.

황의지는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의 징용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군 중지파견군 일원으로 중국 난징에 파견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으나 그는 일본군 소속으로 소련의 전쟁 포로가 되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전전하며 3년 동안 탄광의 광부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 후, 포로송환협정을 통해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자신을 징병으로 몰아낸 친일경찰들에게 북한의 간첩으로 의심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자, 그는 현실에 분노하였다.

그는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폭력과 불의에 맞서고자 스스로 전북도당을 찾아 회문산에 입산하였다. 이름도 소련을 배우자는 의미로 학소(學蘇)로 바꾸고 탱크 병단 사단장이 되어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였다. 빨치산 재편성을 위해 덕유산 송치골에서 도당위원장들이 모여 전북도당의 유격대를 45, 46, 47연대와 보위부로 개편할 때 그는 전라북도 북부지역 무주, 금산, 전주, 완주, 익산, 군산, 옥구, 진안, 장수를 거점으로 하는 45연대의 연대장이 되어 7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빨치산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그러나 백야 전투사령부의 빨치산 토벌 기간에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길에 성수산에서 토벌대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는 결국에 전향하여 살길을 택하였고 철저하게 변신하기로 작정하였다. 황학소는 이제 황의지로 돌아와 남원경찰서 사찰유격대의 부대장이 되어 빨치산 소탕 작전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생과 공로는 인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빨치산 고위급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평생 감시와 규제 속에서 살았다. 사상전향은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 A급 감시 대상자로 분류되어 고초를 당했고, 전두환 정권 때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또 한 번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

친일경찰들의 매국매족적인 부역 행위로 시작된 한 청년의 불행과 고난을 해방된 조국은 오히려 간첩으로 매도하여 빨치산의 길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전향에도 불구하고 그를 빨치산의 그물로 옭아매어 평생 지옥의 불로 그슬렷다. 

누가 황의지 빨치산 병단장을 심판할 수 있는가? 그를 심판하려면 가난한 식민지 청년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몰아낸 친일 부역자들, 지식인들, 관리들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당시 조선의 가난한 청년이었다면 나 또한 강제징용과 징병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황의지를 만나며 강제 징병과 징용을 당한 모든 조선 청년들의 한과 비애, 분노와 좌절이 감정 이입되어 나를 옥죈다.

방호산

방호산은 북한 청소년들의 영웅이었다. 1950년 7월 22일 인민군 6사단이 우리 마을 앞을 지나 순창을 점령하였다. 당시 팔로군 출신의 방호산이 인솔하는 6사단의 군인은 10,800명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장개석의 국민당에게 공급했던 미군 무기를 노획해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군으로서는 한강을 최초로 건넜으며 김포를 거쳐 천안을 통과한 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7월 19일에 금강을 건너고 사단을 세 개로 나누어 7월 20일에 전주와 김제를 점령하였으며 22일에 순창을 24일에 목포를 25일에 여수를 점령하였다. 8월 2일에는 마산 진동리에 집결하여 부산점령을 코앞에 두었다.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기민하게 이동한 부대로 알려진 인민군 6사단의 모태는 놀랍게도 1942년 7월에 연안에서 출범한 조선의용군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군사조직으로 화북지대에서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군부대이다. 사령관은 무정, 참모장은 박효삼 이었으며 박일우, 최창익, 한빈, 김두봉, 윤세주 등이 함께하였다.

일본 항복 이후에 조선의용군은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고 3개 지대로 나뉘어 동북으로 이동하며 팔로군을 도와 국민당 군과 싸웠다. 전투 과정에서 제1 지대는 1948년 11월,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모택동의 양해를 받아 1949년 7월 25일, 사단장 방호산의 인솔 아래 입북하여 인민군 6사단을 만들었다. 당시 6사단 외에도 5사단, 12사단이 동북조선의용군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졌으며 이밖에도 1,000~2,000명 정도의 동북조선의용군이 산발적으로 입북해 인민군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동북조선의용군은 북한군 전체의 3분의 1을 구성하며 북한군의 전력 강화에 이바지하며 이념전쟁으로 동족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었으나, 연안파로 분류되는 그들의 전공(戰功)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로 역사에서 지워졌다.

최덕신

최덕신은 순창에서 견벽청야(堅壁淸野)의 빨치산토벌로 명성을 떨쳤다. 최덕신은 1914년생으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해방 이후에 귀국하여 1946년 육군사관학교 특별과정을 마치고 1950년에 미국에서 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50년 8월 27일 지리산 일대에 배속된 11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예하 제20연대, 제13연대, 제9연대를 창설하고 제11사단 창설을 끝마쳤다. 10월 1일 육본이 작전명령 제207호를 발령하고 제11사단 예하 9연대에 육군 제5 훈련소 장교 87명과 사병 1,500명을 보충하자, 10월 4일 최덕신 중장은 작전명을 ‘견벽청야’(堅壁淸野)로 하고 10월 10일에 제11사단 작전명령 제5호 ‘지리산 빨치산 토벌 명령’을 내리고 제13연대는 전라북도로, 제20연대는 전라남도로 제9연대는 지리산으로 출동시켰다. 11사단 예하 제20연대는 1950년 11월 6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순창군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 11월 6일, 순창지구 섬멸 작전, 12월 6일에 동계면 어치리 소탕전, 51년 1월 26일과 30일에는 복흥면 백방산 소탕전, 2월 9일부터 16일까지는 구림면 회문산과 장군봉 소탕 작전, 2월 13일에는 구림면 장군봉 소탕 작전, 2월 14일에는 쌍치면 774-2 고지 및 동북방 고지 소탕전, 15일과 16일에는 쌍치면 644고지 소탕전, 19일에는 쌍치면 586고지 소탕전, 21일에는 구림면 회문산 소탕전 3월 5일에는 구림면 장군봉과 회문산 소탕전이 있었다.

제11사단은 토벌 작전을 수행하면서 빨치산 점령지역의 마을을 점령하고, 빨치산이 도주하고 난 후, 주민들만 남은 마을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인민군 점령기 부역자와 좌익 활동 가담자를 처벌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들이 희생당하였다. 결국, 오랜 세월 회문산 골짜기를 누비던 원주민들은 모두 흩어지고 소멸하고 말았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의하면 군경에게 희생당한 군민이 총 28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희생자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여성·어린이·노인이라는 사실은 토벌 작전을 명분으로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민학살은 순창뿐만 아니라 거창, 함양, 산청, 남원 등 지리산 주변의 산골 마을 여러 곳에서 자행되었다. 이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 강요, 재산 약탈 등의 만행이 토벌군에 의해서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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