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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응전‘진리의 빛을 따르다’ 3(요한복음 15:19)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6.11 04:36
▲ Quinten Metsys, 「esus Chasing the Merchants from the Temple」 ⓒWikimediaCommons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진리의 빛을 따르다’라는 주제로 말씀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도전과 응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영적 우정을 나누길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저 종이 아니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길 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교제하며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것, 곧 진리를 우리와 공유하십니다(요 15:15). 우정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우정은 곧 삶의 지향 가치를 공유하고 함께 실천하면서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내내 제자들과 동거동락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그저 추상적 가치로만 여겨졌던 것을 삶의 한복판에서 실제로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철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경험가능한 실체화된 진리를 보았습니다. 그분에게서 병든 자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다.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차별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가시적 물질 세계 속에 비가시적 영적 진리를 구현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한복판에 영적 세계가 깃들어 있음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박된 우리를 택하여 이 영적 세계로 불러 세우셨습니다(요 15:16). 우리 존재의 질적 변화와 우리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우리를 당신의 세계로 초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침투한 영적 세계에 함께 거주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우정의 선물입니다. 영적 우정은 친구가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친구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의 이 우정어린 초대를 달가워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과 가르침은 분명 당시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 이질적이고 낯선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위협적이고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악으로 매도하고 적대했습니다(요 15:18). 지금 세상은 예수님을 비과학적이고 무용하다 판단하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 온전히 거하여 살려면 우리가 속한 세상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한계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적대와 무시에 응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 15:19). 물론 이것은 우리 홀로는,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가능합니다(히 12:2).

예수님은 당시 이 세상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셨습니까?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왜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까? 마가복음 11장 18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를 모의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성전 정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희생 제물을 큰 값으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며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선언하셨던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 가치와 의미 체계, 제도, 법, 인습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엄격한 위계의 공간이었습니다. 번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까다로웠습니다. 성전 수비대의 신분 확인부터 시작해서 성전 출입 전 반드시 정결례를 드려야 했고, 제사에 필요한 희생 제물에 대한 철저한 검사도 이뤄졌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희생제물의 흠이 발견돼 성전 상이 파는 희생제물을 큰 돈을 주고 다시 사거나 허탈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뒤로 돌려야 했습니다. 물론 이방인은 아예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나 힘들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감만 더욱 공고해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신다고 여겨지는 대제사장의 권위만 높아질 뿐이었습니다. 속죄 제사 한 번 제대로 드리는 못하는 사람들의 죄의식만 확산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안의 상인들을 내좇으셨습니다.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장애물을 치워버리신 것입니다. ‘만민’이란 표현이 의도하는 게 무엇이었이겠습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위계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으니 속죄 제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일이며, 하나님께 겸손히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성전이 될 수 있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용서는 속죄 제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정리해 말하자면, 예수님은 성전의 실권을 장악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갖가지 수단들로 멀찍이 떼어놓은 하나님을 우리들 가까이로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념체계를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으로 가르치셨고 또 그런 분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종교를 이데올로기 삼아 자기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장악했던 세상이 예수님을 적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세상이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멀찍이 떼어놓는 데 사용했던 또 하나의 수단은 율법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상과 처벌이란 프레임으로 해석된 율법 체계였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더 나아가 당신의 울타리 안에 두시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고 더 나아가 당신의 울타리 밖으로 내쫓으신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부자, 사회적 명성을 얻은 자, 권세자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의인으로 분류되고, 가난한 자, 병든 자, 큰 고난을 당한 자는 모두 하나님께 벌을 받은 죄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신념 체계에서 하나님은 그저 감시자요, 심판관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그 헛된 신념 체계를 진리의 해머로 내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이요.” 연이어 6장 24절에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가난을 저주로 알던 사람들에게 너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부를 축복으로 알던 사람들에게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다가 죽어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연명하다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가난한 자는 죄인이자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요, 부자는 의인이자 하나님께 축복받은 자라는 사회적 통념을 해체시키는 비유입니다.

정리해 말하자면, 예수님은 보상과 처벌의 메커니즘으로 왜곡된 율법이 은폐시킨 하나님, 곧 만인에게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이 세상에 환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40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곧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낙인찍혀 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고 배제된 그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 그의 피부를 터치하시며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죄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잊혀진 이들을 위해 빈들에서 풍요한 식탁을 마련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자라게 하시며 들풀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마련하시고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적이고 형식적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적 의미의 실천이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이자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우리 가운데 이식하고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렇게 우리가 율법의 외피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에 가 닿으려면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허례허식보다 마음의 변화를 강조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심층적 자아, 곧 지각와 사유와 감정과 행위의 토대와 근거를 의미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방향과 성격과 질을 결정하는 내면의 깊이를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변화는 무엇보다 그 중심으로부터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 중심으로부터 온전히 하나님을 지향하고 하나님께 보다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종교적 허례허식으로 명예를 쌓고 사회적 인정을 매개로 강한 유대를 형성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행태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했습니다. 사람들 들으라고 기도했습니다. 티를 내며 금식했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롭고 경건한 행위에는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은 받았으나 하나님의 영은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과의 유대는 깊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의 거짓자아는 기고만장했지만, 그들의 참자기는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 말하지만, 예수님은 종교적 행위보다 마음의 변화, 내면의 심층 자아의 변화를 중시하셨습니다. 내면의 이 근본적 변화를 위해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요청하셨습니다(마 16:24). 우리의 자아가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얽매여 있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 죽어야 새로운 마음이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짓자아를 철저히 내려놓아야 그리스도 안에서 참자기가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집과 고집을 자복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며 하나님께 철저히 집중해야 우리의 심층 자아가 성령의 권능에 붙들려 성령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 이 세상에 경종을 울리시고 이 세상에 도전장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적대와 강렬한 저항을 기꺼이 감내하셨습니다. 그것도 최전방에 서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응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신비로 최후 승리를 확증해 보이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이제 이 세상에 도전할 차례입니다. 이 세상의 횡포에 응전할 차례입니다. 물론 우리 홀로 감당하는 것 결코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고 견인하실 것이며 마침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세상은 어디에 있고 그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 세상은 사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바깥의 어떤 특정 세력과 싸우기 전에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이 내세우는 믿음, 가치와 의미 체계, 법, 제도, 인습이 우리 내면에,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상존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2절에서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가리켜,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물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보상과 처벌의 메커니즘으로 해석된 율법의 체계가, 세상의 논리가 제자들 안에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7절에서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요청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세베대의 아들 야보고와 요한이었습니다. 종교적 허례허식으로 명예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이 제자들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새로운 영적 세계 안에 거주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려면, 먼저 우리 안의 세상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충만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험은 곧 우리를 대신하여 치르신 시험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의 세상과 맞대결하면서 받을 시험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시고 대신 치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단의 유혹은 이 세상이 우리 내면 안에서 속삭이는 달콤한 유혹들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돌을 들어 빵을 만들라.’ ‘네 능력으로 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변용해 네 배를 채우라.’ ‘이성의 능력으로 물질을 탐구하고 활용해 네 욕망을 채우라.’ 이런 속삭임으로 들리지 않나요? 영성을 잃어버린 세상, 눈에 보이는 가치를 상실한 세상, 부가 곧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 진리에 대한 갈망을 망각한 세상이 우리 안에 있으니 우리가 이제는 이 세상에 도전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참되고 풍요한 삶이 하나님께 있으니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응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천사가 너를 받아 주리라.’ ‘사회적 지위가 바로 너 자신이니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라.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할테니까. 모두가 너를 떠받들고 추앙할테니까.’ ‘이런 속삭임으로 들리지 않나요?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 사회적 지위가 곧 우리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이 우리 안에 있으니 우리가 이제는 이 세상에 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니 이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데 힘쓰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법을 터득하고 훈련함으로 이 세상에 응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를 예배하라. 네게 권세를 주리라.’ ‘세상을 좇아라. 세상에 보화가 있다. 세상의 것을 탐하라. 세상에서 성공해라. 그래야 네게 힘이 생긴다. 그 힘으로 네가 주인이 돼라. 네가 세상을 다스려라.’ 이런 속삭임으로 들리지 않나요? 세상에서 얻은 힘으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이 세상 위에 군림하라는 거짓말에 이제는 우리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 거짓말에 이제 우리가 도전해야 합니다. 온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세상의 흥망성쇠가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이제는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함으로 이 세상에 응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도전하시고 이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사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히 이 세상에 도전하고 응전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너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도우십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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