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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거두신 적이 없다벌보다 은총이 크다(창세기 3,8-21; 마태복음 11,28-31)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4.06.13 04:34
▲ Gustav Dore, 「Adam and Eve driven out of Eden」 ⓒWikipedia

창세기 2-3장은 창조 이야기와 동산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로 보충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동산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뱀이 말한 대로 그러한 것을 아는 일에 있어서는 신적인 존재들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지만, 그러한 인간이 생명나무마저 따먹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동산에서 쫓아내고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이 능력의 출발점이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능력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만나겠습니까? 사람이 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상당부분 해결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삶의 방식은 꾸준히 변화를 겪어왔고, 우리는 이를 문화 또는 문명이란 말로 총괄합니다.

그러므로 창 2-3장은 인류문화의 근거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서 찾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화/문명이 인간의 이같은 어두운 면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은 현대문명이 부딪힌 지구위기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지금 이 문제를 말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동산 이야기와 달리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땅을 갈고 땅에 생명이 자라게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함으로써 인간의 존재와 활동을 긍정합니다. 인간의 일이 다른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목표가 지켜졌다면, 오늘의 지구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인간과 땅과 다른 생명들이 공생하고 서로를 북돋는 관계, 이것이 창조의 목표였음은 창 1장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다른 길로의 시작이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오늘의 본문은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의 명령을 어긴 인간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이 이야기는 3장 6절에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7절에서 다르게 행동합니다. 2장 25절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그들은 창조 이후 벌거벗은 채 살았으나 누구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나무 열매를 먹은 후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전과 다르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그 모습으로 서는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웠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누가 그들에게 벗은 것을 알려주었는지? 아니면 먹지 말라 한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인지? 아담은 이실직고하지만, 그의 말은 그가 책임을 아내에게 돌리며 하나님도 책임이 없지 않다고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두려움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하와에게로 향합니다. 네가 대체 무슨 일을 한 거냐? 아담이 하나님에게 그녀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고 했기에, 하나님은 그렇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바꾸면, 어떻게 네가 이렇게 할 수 있어?가 될 것 같습니다. 기 막혀 하는 모습이 그 물음에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신 것일까요? 여자를 창조하는 과정을 보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동물을 만든 것은 시행착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의 길을 가십니다.

아담을 비롯해 모든 생명들이 흙을 재료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땅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데 반해, 여자는 아담을 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땅에 대해 간접적입니다. 유일한 예외입니다. 아담에게 상응하고 돕는 자라는 조건을 세우고 그렇게 정성을 들이고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었는데, 이런 일을 하다니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과 비슷한 방식으로 답하며 뱀에게 그 원인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최종원인을 확인하고 이어서 뱀과 하와와 아담의 순서로 벌을 주십니다. 이 벌들로 현재와 같은 세상의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기어다니는 뱀의 모습이나 진통하며 아이를 낳는 것이나 가시덤불이나 엉겅퀴 같은 잡초들을 제거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담 대신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땅 때문에 사람이 창조되었는데, 사람 때문에 땅이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저주 받은 땅은 그 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땀을 요구합니다. 땀의 대가로 사람은 땅에서 먹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땅 위에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수고(이짜본)해야 살 수 있는 존재! 수고란 땅을 갈도록 창조된 것에서 크게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 목적이 부정당하지 않은 것은 그와 같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땅과의 기본적 관계가 계속됨을 뜻합니다.

눈길을 끄는 다른 하나는 여자에 대한 벌입니다. 정성과 기대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를 사용하며 그 앞에 그 동사의 독립부정사를 놓는 것은 강조의 표현입니다. ‘크게 하다, 많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를 강조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런데 더하는 내용이 특별합니다. ‘수고(이짜본)와 임신’입니다. 이를 따로따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와’라는 접속사를 문맥에 맞게 해석해서 하나로 읽어야 하는지는 좀더 따져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곧’이란 말로 바꿔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너의 수고 곧 임신을 크게 더하겠다가 됩니다. 이것이 왜 벌인지는 그 다음에서 밝혀집니다. 진통(에쩨브)하며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 수고에는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여자의 수고는 생명과 관계가 있고, 남자의 수고는 땅과 관련되고, 그러한 것으로서 생명과 관련됩니다. 생명을 위한 일이 땀과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벌의 기본 내용입니다. 동산에서 내보내진 사람에게 생명나무에 도달할 길은 막혔습니다. 생명의 존속을 위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고하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이 이야기의 끝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숨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것 때문에 두려워 했고 하나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그러한 자에게 옷을 지어준다는 것은 벗은 몸을 가림으로써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벌을 가했지만 하나님은 이로써 그를 다시 품습니다. 사람은 벌 아래 있지만 동시에 은총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은총이 벌의 무게를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도 이에 비춰 읽을 수 있습니다. 본래 이것은 특히 종교가 부과한 짐들 때문에 질식사할 것만 같던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 점을 감안하고 여기서는 인간의 실존과 연관하여 읽고자 합니다. 수고와 고통으로 힘겹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것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이 아닌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욕망에 이끌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에게 이 말씀은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벌로 씌워진 수고의 멍에가 사람이 땅에 있는 한 계속되겠지만, 죄의식을 강요하고 삶을 더 지치게 하는 교리의 멍에를 내려놓고 예수의 멍에로 바꿔 메고 예수와 함께 다니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이 입혀준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삶에 쉼이 있습니다. 평화이기에 진짜 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당한 세상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을 실현시켜야 하는 곳입니다. 생명나무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있으며, 새 삶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은총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벌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은총의 손길을 감추시고 있습니다.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배움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욕망을 따라 사는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절제하며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생명의 길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대상화하고 서로를 상품화하며 서로를 소비하는 사회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옷을 해 입히고 삶에 쉼과 여유와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에게서 사람을 존중하고 생명을 아끼는 모습을 보고 배워 현대사회의 거센 비인간화의 조류를 거슬러 살 수 있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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