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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기준과 규칙을 깨고 사랑으로”(룻기 1:8-18; 갈라디아서 3:23-29; 요한복음 4:7-26)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4.06.17 03:27
▲ Jean Baptiste Auguste Leloir, 「Ruth and Naomi」 ⓒGetty Image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는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애초에 상황을 통해 평안을 누리겠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방향이 아닙니다. 상황은 결코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의 상황이 끝나면, 또 다른 상황이 찾아와 끊임없이 나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상황을 통해 평안을 누리려 하기보다 이미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평안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이 평안을 선택할 때 참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평안 속에서 성도는 ‘내가 여전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삶을 누가 인도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날마다 이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님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은 다수의 사람이 지키는 규칙을 잘 따르는 편이십니까? 규칙을 어길 때는 어떻습니까, 불편하게 여기십니까? 내가 세운 기준과 규칙이든, 문화에 의해 세워진 기준과 규칙이든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이 기준과 규칙과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나의 유익이나 이익과는 다르게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결과를 얻게 될지라도 나의 유익이나 이익과는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행동해야 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타인의 생명을 살리려 할 때, 타인의 어려움을 도우려 할 때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는 삶을 살려 할 때 기준, 규칙, 유익, 이익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준, 규칙, 유익, 이익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게 되고, 내 안에서도 저항감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렇게까지 해서 그렇게 해야 해?’라고 말입니다. 이런 경우들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오늘 함께 읽은 룻기 본문과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갈라디아서 3:23-29, 요한복음 4:7-26의 본문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 땅은 차지했으나, 아직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명의 여성 나오미와 룻이 등장합니다. 나오미라는 여성은 엘리멜렉이라는 남성과 본래 사는 지역에 기근이 들어 이방지역인 모압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이주한 곳에서 남편은 죽고 두 아들만 남았는데 두 아들은 이방인인 모압 여성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러다 두 아들마저 나오미보다 먼저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나오미의 신세를 룻기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5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요즘 시대는 남편이 일찍 죽는 게 홀가분하고, 기쁘기까지 한 일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당시에도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경제적으로는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먹고 살 일이 큰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며느리들이 여전히 나오미 곁에 있었지만, 성경은 ‘홀로 남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두 며느리는 경제적으로 나오미에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제안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6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7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그러자 두 며느리는 큰 소리로 울면서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한사코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11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런 말을 하는 배경에는 신명기 25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남자 형제가 죽었는데 그 형제에게 아내가 있었으면 그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사람의 아내는 딴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지 못합니다. 남편의 형제 한 사람이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신명기 25:6)

그렇기에 두 며느리들을 더 이상 책임질 수 없어 간절하고도, 간곡하게 사정하여 친정으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과부가 된 친정어머니가 아니라 과부가 된 시어머니와 함께 두 며느리가 산다는 건 경제적인 사정과 맞물려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음을 쉽게 추측하게 됩니다.

나오미 자신도 고향 땅에 경제적인 의지를 하기 위해 떠나는데, 두 며느리까지 심지어 이방 사람인 며느리와 함께 돌아갈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이런 나오미의 간곡한 만류에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룻은 더 강력하게 자신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향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의도와 배경은 무엇입니까? 룻이 왜 이렇게까지 나오미와 함께하려고 하는지 본문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후 룻기 2장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룻의 행동이 나옵니다.

“어느 날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그래, 나가 보아라.’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룻기 2:2-3)

그런데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는 행동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밭의 주인인 보아스가 룻에게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우리 일꾼들이 곡식을 거두는 밭에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도록 하시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댁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소.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단지에 가서, 젊은 남자 일꾼들이 길어다가 둔 물을 마시도록 하시오.”(룻기 2:9)

밭에서 일할 때, 젊은 남자 일꾼들로부터 쉽게 희롱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단단히 일러두겠소.’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임에도 룻이 나오미를 위해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경제적인 행동을 합니다. 나오미를 향한 사랑과 긍휼이 있고, 다른 시선과 관습, 율법보다 사랑이 컸기에 가능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오미를 향한 룻의 사랑이, 다른 것들을 이겨낸 것입니다. 다른 규칙과 관습, 율법이 룻의 나오미를 향한 긍휼과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룻 안에서도 있었을 저항감을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신약의 본문에서도 이런 룻과 같은 사랑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25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게 된 배경은 성경에 기록된 할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 된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이방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했고, 시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바울은 이제 더 이상 할례가 아니라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당시의 규칙, 기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니 어긴다는 표현은 너무 약하고 이런 선포를 통해 죽임을 당할 수 있음에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유대인들이 멸시하며 원수로 여겼던 사마리아인 여성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한복음 4:20)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요한복음 4:21)

파격적인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 때가 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선포도 살해당할 수 있는 불법적인 선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룻도 바울도 예수님도 당시의 기준, 율법, 관습 등을 어기며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어떤 기준, 율법도 사랑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선포했고 또 행동했습니다. 사랑이 이겨야 한다는 말씀들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는 당연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기준과 규칙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기준은 사랑 앞에서 허물어져야 합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에 의한 기준, 규칙이 있지만 불편함을 이겨내고, 사랑이 이기도록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구도 비껴가지 않도록, 사랑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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