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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적대화와 부종부횡의 윤리적의 계보학⑩
박연주(동국대 다르마칼리지 대우교수) | 승인 2024.06.19 03:40
▲ 박연주 교수

이 글에서 필자는 인간 세상에 있어서 타자화와 배타성을 넘어서 타인의 적대화, 적대의식의 주요한 원천으로서 엘리트주의와 그의 바탕에 자리한 특권의식과 선민의식, 우월감과 같은 심리가 가지는 위험성에 먼저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대개의 사람은 남보다 우월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우월의식이 타인에 대한 일종의 ‘권력’ 행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넘어 집단적 우월감과 선민의식으로 확장되면, 단순한 배타적 ‘우리’를 만들고 그를 공고히 하는데 그치지 않고 ‘약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지배와 억압, 혐오, 적대화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하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현실이다. 돈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특권층 엘리트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권력과 헤게모니를 장악할 뿐 아니라, 엘리트가 아닌 ‘타자’의 기회마저 짓밟아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감히 엘리트의 세계를 넘본 타자를 악마화, 적대화하며 몰락시키려 애쓴다.

일찍이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보여 준 지배층의 가치조작과 그 정당화의 역사에 대한 통찰대로, 특권층 엘리트들이 막강한 자본으로 군사력과 결탁해 무력적으로 민중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또 이러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 및 그들의 특권의식 내지 선민의식을 정당화하고 절대적으로 우월한 가치로 미화시키는 문화・사상적 지배를 꾀하고 있다는 것 등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평화를 저해하는 주범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자는 약육강식의 논리로서 엘리트주의와 그 권력을 흡사 자연적 법칙인양 정당화하기도 한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자연이고 사람 또한 자연이므로 당연히 강한 자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자연과 동일시한 (의도적) 오류부터 시작해서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논리인지 여기서 일일이 따지기도 힘들다.

한 가지만 지적해 봐도,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로 대개 공인된 어린이, 노인, 장애인은 모두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저 ‘강자’에게 굴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말인가? 마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우생학과도 다를 바 없는 가짜 과학, 가짜 논리이다.

당연히 인간은 자연이며 또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역사적·사회적 존재이며 무엇보다도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식(識)’이라고도 일컫는, 폭넓은 의미로 마음을 지녔다는 것, 더욱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함께 나눈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특수성일 뿐 아니라 여기에 그 자신이 우주자연이면서도 자연을 마주 바라보는, 다시 말해 ‘해석’하는 인간의 운명과 사명에 관한 진리가 담겨있다.

유식(唯識)불교가 세밀히 분석하고 규명한 인간 의식의 층층 및 마음의 구조, 이 때문에 서두에서부터 언급한 그 위험한 인간의 우월의식과 약자에 대한 적대감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또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인간은 모든 물리적이고 가변적인 조건들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밀교철학을 이용하여 설명해 보자면, 밀교에서는 세계를 6가지의 근본요소 혹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는데, 바로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 그리고 유식에서 말하는 식(識)의 육대(六大)를 가리킨다. 그리고 만물을 구성하는 이 근본요소들은 상호 불이(不二)·상즉(相卽)의 관계이다.

이 육대 중에서 지·수·화·풍은 우리 눈에도 보이고 만져지는, ‘색(色)’의 물리적인 요소들인데, 일단 이것들이 공(空)이라는 요소와 상즉관계라는 것은 보이는 세계가 모두 연기에 의한 가변적이고 임시적인 조건들이라는, 불교의 근본적 우주관을 잘 말해준다. 또한, 이 요소들이 식(識)과 상즉한다는 것도 결국 모든 것들이 마음이 그리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철학의 기본 사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식사상이나 밀교철학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이러한 허무하고 염세적 색채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불교가 일체의 무상함과 고통스런 삶의 진실을 말하면서도, 유식이나 밀교 등의 대승불교를 통해 전파하는 다른 쪽의 진실, 즉 삶의 긍정적 측면, 불완전하지만 ‘마음’이라는 부처의 선물을 탑재한 인간이 추구해야할 이상이 있는 것이다.

▲ 세상 속에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 이러한 자각이야말로 서로를 이해하는 첫 걸음일지 모른다. ⓒGetty Images

육대가 상즉불이한다는 것은 한편, 비록 현실적으로 굳건히 자리한 물리적인 조건들, 양상들조차 마음에 달린 것,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수양함에 따라 그것들이 ‘공’에 불과한 임시적 현상임을 각성하고, 그 허상으로 인한 모든 부조리와 고통을 떨쳐낼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불교의 깨달음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육대의 요소들이 서로 불이라는 진리를 곱씹어보면 결국 이 세계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모두가 개체로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언어 이전에 마음이 있기에 서로 ‘통’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인간이 사회적이며 역사적 존재일 수 있는 이유도, 이 마음으로의 소통에 바탕한다. 육대의 논리를 이해할 때 이 모든 것이 ‘공’이란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몹시도 공허하겠지만, ‘진공묘유(眞空妙有)’라던 유식학의 논사들이 방점을 둔 긍정의(cataphatic) 진리론은 바로 마음으로 인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설파한다.

불교의 다양한 사상들과 교리들을 알게 되면 될수록, 만물의 불이, 곧 ‘자타불이’의 진실성과 조우하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메커니즘이자 그 내용의 골자라는 점을 거듭 거듭 새기게 된다. 진정한 깨달음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수직도 아니고 수평도 아니다(부종부횡不縱不橫), 한꺼번에 만물이 시공간을 비롯한 모든 차원들을 초월하여 다 함께 얽혀있는 실재를 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의 핵심은 우리의 일반적 관념과 사고로 인식하는 사물과 현상의 경계나 차이가 모두 착각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실상 그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거기엔 애당초 내가 혐오하고 억압하며 지배할 대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자타는, 모순적이게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대승불교가 지닌 인간 윤리의 방향과 지향점은 이미, 언제나 명확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불완전하고 일체가 ‘고(苦)’라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 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연기공의 조건성이 우리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탓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면밀히 ‘해석’해보면, 육대 상즉의 원리가 보여주듯, 우리의 의식으로 인해 그 불완전한 조건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무애無碍)을 의미한다.

이렇듯 인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비극이면서도 구원이다. 하지만 이 마음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동물의 세계에서처럼 실제로 서로 죽이고 먹히고 하지 않아도 우주자연 속에서 다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마법같은 수단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과 사명에 관한 진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진실과 진리에 수긍하며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과 행위에 달린 몫이다. 밤나무뿌리를 응시하다 온갖 것이 함께 얽혀있는 세상만물의 본질을 본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소위 깨달음을 체험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마주하고 존재의 진실을 무질서, 무가치하다고 보며 절망했다. 허무와 외면과 거짓현실로의 도피라는 해석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너와 나의 불이라는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여 상생과 평화의 실천을 모색하는 해석을 택할 것인지는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박연주(동국대 다르마칼리지 대우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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