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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넘어선 능력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4.06.23 02:00
▲ 지중해 지역의 로마적 지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기에 바울은 그러한 지혜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Getty Images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분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린도전서 2,2)

이 구절은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한번 다루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작게는 1-5절에 속해 있고, 넓게는 1-16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절은 2절을 제외하면 1절과 4a절, 3절과 4b-5절이 짝을 이루는 평행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의 2절은 6절 이하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는 주로 6절 이하와 관련하여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1-5절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a),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b).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a)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b).

이 단락은 좀더 세밀하게 구별하면 4-5절은 4a와 4b,  5a와 5b와 평행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대비됩니다. 그러면 이는 단락 이해에 어떤 영향을 끼칠런지요?

1절은 4a와 5a절과 연관이 있으므로 2절은 4b와 5b절과 연관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절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 이가 곧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3절이 독립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1-5절의 구조는 1-2절이 4-5절(4a/4b//5a~5b)과 짝을 이루며 3절이 중심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가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은 한편  4b절과 연관해서 이해될 수 있고 다른 한편 지혜라는 말이 함축하는 고린도 지방과 교회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두려워 하고 떠는 상황은 지혜를 숭상하고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그 지역에서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 있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고, 그가 이를 극복한 것은 성령입니다.

그러면 2절은 저들의 지혜를 빌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 안다는 것이지 어떻게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는 더이상 알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아는 역사적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로 모아지고, 이 사건은 역사적 예수의 귀결점입니다.

그는 이 사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지혜 전통에 서있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예수 사건을 증언한다는 것은 그들을 설득할 고도의 지혜적인 변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리석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 선다는 자체가 어렵고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리석음의 길을 가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에게서 모든 주저함과 핑계 등을 제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지혜롭다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달린 역사적 예수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가 두려워 했던 저 지혜들은 쓸모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으로 대표하는 일발적인 이해가 문제임을 알려줍니다. 그에게 이것은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치려 했던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지 그 자체가 목표일 수 없습니다. 그가 그것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렇게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는 그 삶을 가리키는 일종의 손가락입니다. 그것에만 주목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더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할까 하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울이 그리는 믿음입니다. 믿음과 고백과 삶은 단계가 아닙니다. 셋이 하나이고 전체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기 어려우니 믿음의 온전성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이같은 의미의 온전한 믿음이 우리의 것 되는 이날이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가 되고 삶의 터전과 목표가 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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