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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정치, 정치 없는 영혼: 《국가론》 vs. 《신국론》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20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4.06.24 04:32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했습니다. 선거 때면 늘 그렇듯이 우리는 총선에 출마한 정치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정치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영혼 없는 정치인’들을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정치가 권모술수로 점철된 이익 추구의 수단이 된 정치인,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나서지만 그것은 입에 바른 헛소리일 뿐, 마음으로는 다음에 또 당선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치인, 공천받기 위해서 신념과 정책이 아니라 배신과 줄서기와 아부에 능한 정치인들이 바로 ‘영혼 없는 정치인’들이지요.

지금부터 1,600년 전, 로마 제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정치와 영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그의 《신국론》(1)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신국론》을 쓴 것은 413년부터 426년 사이, 즉 서고트족에 의해서 로마시가 침략과 약탈을 당한 후였습니다.(2)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그 원인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정치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기독교적 정치철학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와 영혼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면서도 갈등적인 현실을 규명함으로써 이후 기독교 정치사상과 서양 정치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신국론》에서 인간 사회를 ‘신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라는 두 개의 도시로 나누고, ‘신의 도시’는 영혼의 영원한 안식처를 상징하며, ‘인간의 도시’는 죄와 멸망으로 얼룩진 현세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정치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 인간의 도시를 지배하는 무질서를 조절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권력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존재하며, 정의로운 통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혼의 최종목표는 신의 도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영혼은 죄악과의 싸움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정치는 영혼의 이러한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정치는 외부적인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영혼이 내적인 영적인 성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정치는 동시에 영혼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이 권력에 집착하고 부패하면, 그것은 억압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영혼은 정치권력에 맞서 저항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와 영혼의 관계를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갈등적인 관계로 보았습니다. 정치는 영혼의 영적인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영혼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정치의 양면성을 인지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지지하면서도 죄악에 물든 정치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치와 영혼의 관계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중심으로 연구한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 1950- )의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 - 유한자의 조건과 무한자의 부르심》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

로완 윌리엄스는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유대계 독일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비판을 소개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을 거부한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단 한 명의 사상가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의 권위를 거부하고 세상의 종말을 기대함으로써 소외된 사람들의 공동체였지만, ‘사랑’, 곧 공로나 업적과는 무관한 카리타스로 묶인 공동체라는 점에서 비세상적인 공동체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공적 영역을 대체했다고 평가합니다.(3)

한나 아렌트의 비판은 인간 본성을 근본적으로 악하고 타락했다고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고, 정치는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여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나 아렌트는 인간을 내면의 영혼과 외부의 세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인주의적 관점과 역사를 죄와 구원의 이야기로만 보는 부정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참여보다 개인적인 영혼구원에 더 큰 가치를 둔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합니다. 끝으로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폭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치적 공동체를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4)

한나 아렌트의 이런 부정적 평가에 대하여 로완 윌리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고대의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가치를 (오히려) 전복한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5)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고대의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가치를 전복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신국론》 제19권에서 ‘정치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이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통합된 존재이며, 정치적인 활동도 영적인 삶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적인 것 자체를 다시 정의하려고 한 것이지요. 즉 공적인 것이, 실제로 공적일리 없고, 진정으로 정치적일리 없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바깥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대립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있지 않고, 정치적인 미덕과 정치적인 악덕 사이에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입니다.(6)

당시 로마 제국의 국가철학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 - 기원전 43)의 《국가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키케로는 국가를 법에 의해 통치되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정의가 국가의 근간이며, 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통치방식은 ‘혼합정체’, 혹은 ‘공통체’(commonwealth)로서 왕정, 귀족정, 민주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정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강조했는데,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키케로의 《국가론》, 로마가 ‘공통체’라는 주장을 허물어뜨립니다. 키케로는 정의를 공정하고 평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정의가 인간의 죄악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7) 또 키케로는 국가의 목적을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목적이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8)

키케로는 종교를 국가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보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가 국가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며, 국가는 종교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국가론》이 인간의 죄악성을 고려하지 않고,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종교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비판한 것이지요.

《신국론》의 초반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국가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키케로의 국가론 가운데 수용할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방신들과 옛 철학자들도 시민들이 영원한 법에 부합하여 잘 살 수 있게 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9)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로마 공화정의 성공은 로마 신들의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국가 붕괴의 명백한 요인은 지도자들의 영광에 대한 욕망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로써 국가의 지도자는 영광을 갈망하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권고한 키케로의 주장을 논박한 것입니다.(10)

업적에 대한 집착은 권력과 걸출함에 대한 집착을 낳고, 영광을 추구하려는 의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얻고자 하는 충동에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판하면서, 강제적인 힘으로 특징지어지는 지상의 나라에 대한 반대인 하나님의 도성은 선을 향한 사랑과 갈망이 지배하는 도성이라고 합니다.(11)

그렇다면 하늘의 도성에 사는 시민들은 강압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하늘 도성의 시민들도 강압을 행사합니다.(12) 하나님의 도성은 세속 권력과 다른 방식으로 그 권력을 행사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목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의 목적은 인간의 반항적인 의지를 가능한 신적 질서에 어느 정도 가까운 것으로 회복시키는데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강압은 평화를 깨뜨린 자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13)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가 ‘명령’과 ‘돌봄’을 연결한 것은 중요합니다. 돌본다는 것은 영적으로 양육한다는 것입니다. 권한을 가지고 돌보는 일은 몸의 평화가 영혼의 평화에 기여하고,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 있음을 당연시합니다.(14)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황제들 가운데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2-337)와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347-395)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황제의 미덕을 칭송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황제는 권위를 공유하거나 위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자신이 주로 바라는 일은 자기 영혼을 질서에 따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며,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사랑이지 영광을 바라는 욕망이 아닙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러한 이상을 잘 이루어가는 통치자로 간주됩니다.(15)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전제적 패권에 매달리지 않았고, 사사로운 원한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대학살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참회의 소임을 받아들였습니다. 통치자가 권력을 공유하고, 비판과 굴욕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배욕이나 과시욕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피지배자들을 위해 법과 강압을 사용한 것이라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칭송했습니다.(16)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제3권과 제4권에서 제국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팽창주의적 국가가 하나님의 도성에 적합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지배욕으로부터 나온 제국주의적인 대담한 행동은 언제나 공동체의 진짜 문제들을 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때때로 우리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며 침략하는 적을 진압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국력을 강화하거나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실상 다른 이의 공격성을 자극하고,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며, 증오와 공포의 대상을 만들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말합니다.(17)

키케로는 정의로운 국가라면 자기–방어나 신의, 명예, 특히 조약의 의무–를 위해서만 전쟁에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키케로에게 자기방어는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은 그런 경우에도, 심지어 자기방어를 위한 경우에도 결코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고 응수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국가가 그 온전성을, 그 신의를 잃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8)

이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은 적절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아렌트의 공적 참여 개념과 유사한 모든 것과 굉장히 상충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공적 참여를 보다 ‘사적인’ 사랑의 윤리로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세계의 공적 생활이 충분히 공적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적 사상에 가장 가깝게 평가한 밀뱅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 혹은 정치를 신학적으로 이론화하려 했던 게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형태가 인간이 잘 사는 형태 중 가장 오래 지속되는지,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이 길러야 할 덕목은 어떤 것인지를 고심했다고 합니다.(19)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서 그리스도와 정의로운 사회》라는 책을 쓴 로버트 도다로는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정의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참회와 자기반성 사이의 연관성”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는 참회하는 사회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20)

공인, 특히 정치인은 인격적 겸손과 참회를 연민의 관심과 결합하여 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었다는 것이지요. 모든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참회하지 않는 ‘내로남불’의 정치인들이야말로 ‘영혼 없는 정치인’이지요. 그러나 ‘정치 없는 영혼의 정치인’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오직 개인 영혼의 탓으로만 돌리고 구조악을 보지 못하는,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 정치인이야말로 ‘정치 없는 영혼의 정치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영혼 없는 정치인’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정치 없는 영혼의 정치인’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가 존경할 수 없는 교역자가 베푸는 성례전을 거부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주

(1)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0권, 성염 역주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2021).
(2) 서로마 제국의 최종 멸망은 476년으로 기록된다. 서고트족의 지휘관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이 됨으로써 서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3) 로완 윌리엄스,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유한자의 조건과 무한자의 부르심》, 이민희/김지호 역 (서울: 도서출판 100, 2021), 211.
(4) 한나 아렌트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비판은 그녀의 박사학위청구논문, 《사랑과 성 아우구스티누스》(1929, 서유경 역, [서울: 텍스트, 2013]), 《인간의 조건》(1958), 《어둠의 시대에 관하여》(1968) 등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5)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12. 
(6)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15.
(7)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9-22권, 성염 역주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2018), 2221.
(8)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9-22권, 2223.
(9)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21.
(10)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22-223.
(11)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24.
(12)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27.
(13)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28.
(14)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29.
(15)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30.
(16)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31.
(17)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32.
(18)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33.
(19)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44.
(20) 로완 윌리엄스, 같은 책, 245.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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