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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는 순간‘진리의 빛을 따르다’ 5(요한복음 16:21)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6.25 03:40
▲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고통의 순간에 직면에 피할 길을 간구하지 않았고 그 고통에 맞섰다. ⓒGetty Images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강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진리의 빛을 따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는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때로 아침에 벌떡 일어나기 힘든 것은 그저 피곤해서 만은 아닙니다. 오늘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려면 별 수 있나요? 일어나야지요. 살려면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고통을 피하는 길을 찾고 싶어 하지만, 실상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잠깐은 피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결국 만납니다. 불편한 사람, 잠깐은 피할 수 있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불편해지는 걸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통을 회피하려는 삶의 태도로는 결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작은 고통을 반복적으로 회피하다가 결국 큰 고통을 당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학생들에게 공부, 꽤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회피하기 쉽습니다. ‘나중에 하면 돼지’, ‘일단 기분 전환부터 하자’, 이렇게 자꾸 회피하다보면 공부는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 버리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부가 부족해서 자기 소망이 좌절되는 진짜 고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보이는 게으름은 고통 회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 회피으로서의 게으름은 사실 우리 삶 곳곳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 게으름이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만 기억하게 만드는 주범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스캇 펙은 게으름을 인간의 원죄로 꼽습니다. 고통을 핑계로 삶 그 자체를 저주하거나 삶을 그저 쾌락과 욕망의 무대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게으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통을 회피하려는 마음 그 자체야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 마음은 사실 우리의 심층에 내재해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초연한 세계에 대한 기억과 향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을 떠나 세상 밖으로 처음 나왔을 때,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건, 그저 폐호흡을 시작하기 위해서 만은 아닙니다. 엄마 뱃속에서 경험했던 낙원과는 다른 차원의 현실을 대면하면서 받은 충격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경험했던 그 완벽에 가까운 안정감과 평화에 대한 기억이 아기 울음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있는 건 모든 고통으로부터 초연한 세계, 곧 에덴 또는 하늘의 본향에 대한 기억과 향수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늘에서 온 존재이니까요. 그러므로 고통은 고통 너머의 세계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고통 없는 세계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또는 고통 없는 세계를 우리 존재의 배경으로 삼고 있지 않다면,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조차 못할 것입니다. 이런 예와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유한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무한에 관한 관념과 의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둠을 어둠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건 빛에 대한 감각과 기억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회피하려는 우리 마음과 관련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도 우리가 고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은 확언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왜 막지 못하시는가? 우리가 고통을 겪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사랑하긴 하시지만 무능하시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우리는 때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고통을 처리할 다른 대안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 고통 중에도 살아야 할 이유이십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럴드 싯처는 삶의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때로 우리의 고통을 허용하시기도 하고,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신다는 점에서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벼랑 끝에서 밀어냅니다. 날개 한 번 편 적 없는 새끼는 얼마나 공포스러울까요? 어미 독수리는 새끼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요? 독수리에게는 모성애란 없는 것일까요? 실상은 정반대이지요. 자기 새끼를 사랑하기에, 그래서 반드시 하늘을 활보하는 독수리로 키워야 하기에, 안쓰러운 마음을 감내한 것입니다. 자기 새끼의 고통을 곁에서 함께 겪어낸 것입니다. 독수리는 새끼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낼개짓을 할 때까지 추락하는 새끼를 자기 어깨로 받아냅니다.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 새끼가 죽지 않는 건 어미가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 우리의 고통을 허용하십니다. 대신 우리의 곁에서 함께 그 고통을 함께 감내하십니다. 때로 우리 너무 고통스러워도 여전히 우리가 삶의 의욕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고통을 통한 구원입니다. 고통 없는 삶이 구원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기뻐하는 삶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여 기쁨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없는 곳으로 우리를 건져 올리신 게 아니라 우리의 고통 속으로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이 그저 고통으로 끝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으로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참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다루는 최상의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고통 중에도 십자가 지신 주님께 우리 중심의 시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예고하셨습니다(요 16:16). 하지만 제자들은 당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요 16:17-18). 조금 있으면 못 볼 것이고 조금 있으면 다시 볼 것이라는 표현으로 알쏭달쏭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회피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고 우리 곁을 떠나신다고요?’ 이런 생각이 들 만큼 그것은 제자들에게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꼭 그래야 하시나요?’ 이런 생각이 들 만큼 그것은 제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자 곧바로 ‘안 된다고,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만류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나 십자가는 회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직시하고 통과해야 할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16장 23절에서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그 의미를 깨치지 않고 십자가의 능력을 맛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받을 고통과 상처를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격려하신 것입니다(요 16:20). 덧붙여 ‘너희가 당할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며, 해산의 고통은 새 생명의 탄생이 가져오는 기쁨으로 인해 더 이상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6:21).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은 반드시 부활의 기쁨으로 귀결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동시에 이 놀랍고 신비한 은총이 제자들의 삶에도 반복, 재현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에 일단 눈을 뜨고 나면 그때는 무엇이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요 16:23-24). 만약 우리가 고통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찾고 구한다면,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편에 온전히 머물러 선다면,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 그치지 않고 삶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며, 그 고통을 통해 맞이하게 될 변화는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풀부물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1차 침입 때 포로로 잡혀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남다른 지혜와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바벨론 왕에게 발탁되어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며 바벨론의 관료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부갓세살 왕의 꿈을 해석해 준 일을 계기로 바벨론의 총리에 오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다니엘의 요청대로 바벨론의 지방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내 엄청난 시련이 닥쳐 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중앙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기를 형상화한 금 신상을 만들어 지방에 두기로 결정합니다. 신상이 완성되고 낙성식을 준비하면서 느부갓네살 왕은 한 가지 중대한 명령을 내립니다. 풍악 소리가 울리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로 신상에 엎드려 절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어길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는 처벌 규정도 함께 공포됩니다. 이 명령은 물론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진짜 왕은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유일한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배짱입니까?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 텐데, 죽음의 공포가 그들의 심령을 에워쌌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질투해 아니꼽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들의 표적이 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느부갓네살은 분노를 표하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아까운 인재들이었기에 즉결 처분하기보다 신상에 절할 기회를 다시 주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절하면 용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 선고했습니다.

그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뭐라 응수했습니까? 다니엘서 3장 17, 18절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의 이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지금 죽음의 공포를 피할 길을 찾기보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하실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어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잊혀지거나 가려질 수 없는 분이며 어떤 고통과 고난도 가로막을 수 없는 분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한 마디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고백은 이대로 풀무불에 던져져도 후회는 없다는 결기입니다. 이 상황 억울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억울해 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죽는 게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이니 두렵지만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이라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어 당장 느부갓네살을 심판하시거나 그의 마음을 바꾸셔서 풀무불 처벌을 면케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우리의 기대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온전히 수용하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눈물어린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냥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베푸신 진짜 은혜와 기적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에 던져 놓았을 때, 느부갓네살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다니엘 3장 24-25절에 의하면, 불 속으로 분명 세 사람을 던졌는데, 불 속을 거니는 사람이 넷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네 번째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 속에서, 타는 듯한 고통과 괴로움의 순간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는 듯한 고통에 함께 하시면서 그 고통 중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 중에도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고통 중에도 우리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고통 중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품격을 유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고통 중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고통 중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을 통과해 기쁨으로 가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 길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의 고통을 처리하고 그 고통에 대응하는 근본 원리로 삼을 때 우리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압도해 온통 어둠으로 물들이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 삶의 기쁨을 더욱 값지고 깊이 있게 경험할 배경이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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