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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를 위해 무릎을 꿇어 주었는가?적성초등학교 시절의 빛과 그림자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 승인 2024.07.04 02:52
▲ 적성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3.1만세운동 참여비는 여전히 정겹다. ⓒ이해학

나는 고향 근처를 갈 때마다 적성초등학교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다. 조그만 포켓 공원이지만 중심에 삼일만세운동 참여비가 소나무 가지에 정겹게 둘러있고 채계산이 우람스럽게 뒤 배경으로 받쳐준다. 나뭇가지만 굵어졌고 최근에 만든 독서조형물이 옆에 만들어진 것 외에 변함이 없기에 이곳이 어린 시절의 추억의 포인트가 된듯싶다. 여기에 앉으면 온갖 추억들이 파노라마 되어 흐른다. 마치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운 듯하다.
 
갓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온 여선생은 예뻤다. 우리를 줄 새워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가’를 가르치고 앞장서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를 부르며 선생님도 아장아장 걸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다고 학교를 오지 말라고 한다. 아직 총소리도 안들리고 비행기만 높게 떠서 오고 가는 것이 늘어났을 뿐이다.

더 황당한 것은 등교를 하였을 때 학교 건물이 일부만 남고 불타 없어져 버렸다. 다만 한 길가 커다란 광고판에 뚱뚱한 김일성이 사과를 깍으면서 <동무 사과는 껍질에 영영분이 많이 있어요> 그 앞에서 깡마른 농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으로 사과 껍질을 받고 있는 그림이다. 그때는 매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니 충격이 일상이되었다.

지금은 몸통만 남은 1회 졸업생이 심었다는 우람한 플라타너스는 넓은 그늘 밑에서 우리는 공부도 하고 놀이도 하고 싸움도 싸웠다. 학교놀이는 동네 놀이와는 달랐다. 동네에서는 자치기를 많이하고 굴렁쇠 전쟁놀이도 하고 가끔 구슬치기와 딱지도 쳤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기마전이나 오징어 게임을 하지만 탄피치기도 하였다. 흔하디 흔한 것이 탄피여서 들랑거리는 였장수에게서 엿으로 바꾸어먹지만 그래도 남은 것을 숨겨와 학교에서 탄피치기를 하였다.

그중에서도 ‘비행기 가이생’을 많이 하였다. 남녀가 내숭을 많이 떨던 시절에 이 놀이가 가장 인기 있었다. 두 편으로 나누어 비행기 그림 안과 밖에서 서로 상대편을 밖으로 밀어 보내거나 끌어들여 줄이는 놀이이기에 좋아하는 여학생 손을 공식적으로 잡기도 하고 허리를 잡고 상대에게 안 빼앗기려고 실갱이를 하며 몸 부딛침을 맘 놓고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책상에서 공부하는 4학년이 그렇게 부러웠다. 우리는 땅바닥에 ‘신라방’, ‘장보고’, ‘관동지진’을 썼다 지웠다 하며 외우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나 4학년부터는 교실이 배당되고 책상이 배당되어 좋아할 무렵 나에게는 치명적 사건이 생겼다. 면 소재지인 고원리(관폄) 아이들이 텃새가 시작되었다. 특히 양병남과 김용택은 악귀 같아서 수업 중 내내 쉬는 시간에 당할 걱정이 나를 짓누르게 하였다.

유독 나와 지북리 김형오가 그들의 덫에 걸렸다. 그 괴롭힘을 다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요즘 학교폭력이나 왕따와 비슷하나 지저분하고 유치한 추억들이다. 관평 아이들 뒤에는 삼수를 비롯한 태주 선배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들이 왜 그리 커 보였는지 공포스러웠다. 권문주 같은 따뜻한 친구도 있었다. 문주는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밥을 주거나 그 당시 막 개설된 전기불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가도록 해 주었다.

나와 같이 괴롭힘을 당한 김형오는 이상한 놈이다. 미국에 건너가서 맨하탄에서 스타박스 커피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한국 문단에 등단하여 시집도 나온 유명시인이다. 그는 미국 복판에서 전라도 토속어로 자연을 노래한다. 더 신기한 것은 나와 똑같이 당한 관평 아이들의 학대를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아니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해에 조그만 좌판에 껌이나 사탕류를 진열한 가게가 생겼다. 지금은 자리를 옮겨 큰 상점이 되었지만. 우리는 돈이 없어도 거기에 모여 침 흘리며 구경하다가 스스로 껌을 만들어 씹었다. 처음에는 밀을 씹었지만 누군가의 정보를 받아 소나무 송진을 따서 섞어 씹었다.

학교 가는 길에 종달새 울고 보리밭 위로 아지랑이 넘실대는 들판을 지나 섬진강 변에서 영자를 만나 삐삐를 뽑아 씹던 일이 잊을 수 없다. 방갓다리 아래 시맨트벽은. <누구하고 누구하고 연애한다네> 하는 낙서판이었다. 나는 김영자 이름을 지우느라 바빴고 그 덕분에 그와 결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학교가는 즐거움이 하나 더 있었다 정확히 몇 학년부터인지 몰라도 교과서를 받은 것이다. 깜짝 기뻤다. 책 뒷표지에는 한국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가 교차하는 그림과-이 교과서는 유네스코 운크라에서 지원했다-는 글자가 크게 써 있었다.

그리고 간수를 나누는 날은 줄을 서서 입을 벌리고 선생님이 주시는 간수를 숫가락 째 빨어먹었다. 문제는 많지는 않았지만 우유가루를 나누는 날 바가지를 가져 오는 아이도 있었고 비료포대를 가져오기도 해서 모두가 웃었다. 나는 아무리 찾아도 봉투가 없어서 척보에다 받아서 방갓다리 밑에서 다 먹었다. 그때 우리들 얼굴은 모두가 하얀분칠을 한 것 같이 눈만 뻐끔한 흰둥이들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뼈속까지 미국에 대한 고마움으로 훈련되고 있었다.

책상에서 공부하는 4확년이 그렇게 부러웠다. 4학년 담임이던 이기한 선생은 시도 때도 없이 손에 달고 다닌 나무막대기로 내 머리를 때려서 나는 늘 그 선생을 멀리 피해 다녔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양 교감 선생도 있다. 어느날 변소에 갔더니 양00 교감 선생 욕이 써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근래에 양 교감이 나를 불러 내가 유등면 소속이니 유등학교로 가라는 것이다. 나는 거절을 하였고 양 교감은 방침이기에 가라고 압박하던 터다.

그런데 이 낙서를 보는 순간 양 교감이 내가 쓴 것으로 오해를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밑에다가 ‘이해학은 유등으로 가라’라고 썼다. 그러면 오해를 사지 않겠지 하는 안도감을 가졌다. 나는 바로 교무실로 불려갔고 양 교감 선생의 이그러진 얼굴이 다가와서 물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나는 우악스런 손바닥으로 맞을 때마다 여기저기 교무실 책상 밑에 처박혔고 다른 선생들이 말려도 그분은 분노조절이 안되었다. 너무 맞아서 얼굴이 붓고 온몸에 멍이 들고 코피가 범벅이 되었다. 나는 그 얼굴을 할머니께 보일 수 없어 권문주네 집에서 잤다. 양 교감은 후에 적성초등학교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양 교감과는 달리 내가 후에 선생이 되고자 할 정도로 꿈을 심어준 분은 안경모 선생이시다. 안경모 선생은 5, 6학년 담임이었고 성품이 온화할 뿐 아니라 나에게 유독 잘해주신 분이다. 원족이라고 한 소풍날은 밤잠 설치며 기다린 날이지만 우리 소풍은 늘 체계산이 단골이었다. 어쩌다 동계면 계곡이나, 유등면 행가리(香家)로 가서 일본사람들이 뚫어놓은 기차길 동굴에 들어가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때도 선생님께 계란을 삶아다 주거나 감장아치를 전달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드린 죄송함을 느끼는데 안 선생님은 자신이 입었던 ‘우와기’라고 불렀던 겉옷을 내게 맞겼다. 양병남이 학도호국단장 선거에 나갔을 때도 나에게 찬조연설을 시키고, 당신의 결혼식에 축사까지 나에게 배려하고 지도해 주셨다. 내가 관평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학교에 가지않고 중간에서 놀았다.

그때 안경모 선생님이 처음으로 화탄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당황한 우리 가족들은 부랴부랴 막걸리 대접을 하였다. 나는 그때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을 말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아니었다. 그분은 나를 장래 희망이 있는 유망주라고 우리 가족에게 직접 증명해준 유일한 선생이시다. 그분 덕분에 나는 5학년 때 졸업식에서 송사를 하였고, 6학년 졸업식에서 답사를 감동스럽게 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참석해보지 않은 졸업식에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안 선생님은 낡은 풍금을 타시면 신들린 듯 도취 되셨다. ‘푸른 하늘 은하수’ 같은 동요를 넘어 가곡을 배웠다. ‘바위고개’, ‘가고파’를 비롯하여 ‘로렐라이 언덕’, ‘아, 목동아’, ‘옛동산에 올라’, ‘싼타루치아’ 등등을 익혀갔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 음악책에 수록된 것을 알았다.

나는 그런 교육이 끼칠 효과와 영향평가는 모른다. 다만 내 경우는 내 생애 전반을 가곡의 감성을 즐길 수 있는 소양이 길러졌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곡을 즐길 호기심과 자질을 길러주신 안경모 선생께 고마움을 바치며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도 느낀다. “우리 시대가 너무 거칠고 분주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안경모 선생께 나는 한가지 실망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우리 반 일등은 누구나가 아는 김영자인데 양영자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몇 번 결석을 하였음에도 6년 개근상을 주는 것으로 보상해 주었다. 후에도 그분을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안경모 선생은 학교 옆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수리조합장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그런데 그 집 딸이 양영자이다. 키 크고 전교생 중 하나뿐인 스타킹에 운동화를 신은 양영자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 다만 아버지 덕에 일등을 가로챈 것이 늘 내 눈에 용납이 안 되었다.

성경에서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마라 한다. 하나님 외에 완벽한 선생은 없기 때문이다. 카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선생이란 제자들의 꿈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보내기 위해 높은 벽 밑에 엎드려 제자가 자기를 밟고 넘어가도록 넘겨주는 것이다. 나는 나를 더 멀리 새로운 세계로 보내기 위해 무릎 꿇어준 선생님들을 더듬어본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릎을 꿇어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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