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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다”출애굽기 강해 20(출애굽기 20:1-17)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4.07.07 02:49
▲ Rembrandt, 「Moses mit den Gesetzestafeln」 ⓒWikipedia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비교가 되는 2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와 바로입니다. 모세는 성경의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제일 존경하는 신앙인이죠. 심지어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사람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기 전 80년의 세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냥 순종한 것이 아니라, 내 인간적인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습니다. 난 이렇게 배워왔습니다. 이게 옳은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따르겠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와 반대되는 인간상이 있습니다. 바로 파라오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누군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바로도 하나님을 많이 만났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만나면서 10번이나 만났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인상을 역사하시는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 있는 건 뭡니까? ‘나에게 득이 되는 게 뭘까? 나에게 해가 되는 게 뭘까?’ 그것만을 따지고 있어요.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게 10가지 재앙이죠. 10가지 재앙을 맞이하면서 바로가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한번 기억해보세요.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지 않아요. 자기 마법사들 불려다가 ‘우리도 할 수 있지? 그래도 해보자!’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요.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재앙을 피하고 내 것을 잘 보존할 수 있을까? 그 꿍꿍이로만 바쁩니다. 마침내는 감당할 수 없는 손해 앞에서 손절하기로 결단합니다.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탁 쳐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는 게 아닙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니까. 자기의 이익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꼬리를 자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아쉬운 마음이 드니까 군대를 보내서 다시 잡아들이려고 합니다. 바로는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강퍅하다고 번역합니다. 그 말이 좀 어려워서 성경을 개정하면서 ‘완고하다’라고 바꿨구요. 우리가 보는 새번역 성경은 ‘고집을 부린다’고 번역합니다.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공통점은 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고집이 세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틀렸는가? 내가 제대로 결정했는가? 잘못된 것은 없는가?’ 돌아보지 않아요. 교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반성하지 않아요.

이런 마음을 에스겔 선지자는 ‘돌같이 단단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모세와 같은 마음은 뭐라고 불렀을까요?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11장의 말씀입니다.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은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착하기만 한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말씀하시는 에스겔 11장 20절을 보면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너희가 나의 말씀대로 생각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 마음을 고쳐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그런 마음인 것이죠. 그럼 돌같은 마음은 뭘까요? 바로의 마음은 뭘까요? 2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갚아주겠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 바로 ‘돌 같은 마음 강팍한 마음 완고한 마음 고집부리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고 굿하고 난리치는 그런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내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올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마음을 납득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서 튕겨져 나가는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내 생각대로 살아갈까? 내 마음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런 것만 고민하는 마음입니다. 그게 우상을 섬기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진짜 우상은 뭡니까? 내 마음이죠.

오늘 우리가 십계명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바로와 같은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왜 모릅니까? 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왜 너 자신의 마음에만 휘둘려서 살아갑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십계명은 그래서 다른 율법들하고 철저하게 달라요. 이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수많은 율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율법들하고 십계명의 말씀은 그 형식부터가 다릅니다.

율법들은 모두 이런 형식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해라’ 혹은 ‘이렇게 저렇게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하면 너희들에게 이런 복을 주겠다. 이렇게 안 하면 너희들에게 이러이러한 벌을 주겠다’, 이런 이야기들이 율법 조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의 말씀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계명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3절 말씀 한번 찾아봅시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뭐라구요? ‘섬기지 말아라’가 아니라 ‘섬기지 못한다’입니다. 둘째 계명은 어떻습니까?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아니죠.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가 아닙니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입니다.

십계명의 명령 자체는 애초에 거부할 수도 없고, 맹목적으로 따를 수도 없는 그런 선언입니다. ‘이거 해라. 이거 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명령은, 우리가 충분히 거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싫어요’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벌을 받더라라도 말이죠. 명령은 내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충분히 어길 수 있습니다. 명령대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철저하게 나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그런 명령이 아닙니다. 우리는 애초에 우상을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우상을 섬길 수 없는 존재라고 선언해버리는 겁니다. ‘너, 이거 안 지키면 혼낼 거야!’ 겁주고 얼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잘 지키면 복 줄 거야. 형통하게 해줄 거야.’ 달콤한 말로 달래고 유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버렸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명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고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순복하고 따를 수 있을 뿐입니다. 거부만 못 합니까?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못합니다. 일반적인 명령은, 내 마음속에서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고 동의되지 않고 믿지도 않아도, 겉으로만 그 명령대로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지독한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원한이 너무나 크고 깊어서 마음의 살의가 가득합니다. 살기등등하게 살아갑니다. ‘만나기만 해봐라. 내가 꼭 죽여버려야지!’ 하고 삽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이 사람은 겁쟁이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죽이면 경찰한테 잡혀 평생 감옥에 갇힐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살기가 가득한데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에는 원한이 가득하고 살기가 가득한 사람! 이 사람은 평생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잘 지킨 사람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내산 언약이 뭡니까?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좋을 땐 잘 지키다가 형편이 달라지고 상황이 돌변하면 ‘나, 하나님 안 믿을래요’ 할 수 있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내산의 계약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되어버리는 존재의 변화라고 했습니다. 정체성의 변화라고 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전혀 변화하지 않고,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서, 겉으로만 사람 안 죽이고 간음 안 하고 도둑질 안 하고 살면 율법 잘 지킨 사람되는 그런 계약이 아닙니다.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가 살인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도둑질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하나님 말고는 섬길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우상을 섬길 수 없는 존재라고, 너희는 마음의 살의를 품을 수조차 없는 그런 존재라고, 아름답게 살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생명들을 하나님과 똑같은 마음 가지고서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이런 존재가 되어버렸어. 너 이제 어떻게 살래?’ 십계명은 이렇게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뭡니까? 대답해야죠. 물으셨잖아요? 물으신 것에 우리가 대답해야 됩니다. 십계명 앞에서 ‘이걸 지켜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지킬까 말까? 얼마나 잘 지켰나 못 지켰나?’ 그런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살인, 간음, 도둑질… 이런 짓 한번도 안 했어!’ 그렇다고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존재를, 정체성을 돌아보는 기도로 응답해야 합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럼 우리 기도해야죠. ‘다른 신이 누굽니까? 나는 하나님 제대로 섬기고 있습니까?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해서는 안 된 일을 할 수조차 없는 일을 내가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섬기고 있다고 나 착각하고 있지 않나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죠. 내가 섬기는 다른 신이 뭐가 있는지 철저하게 내 마음을 살펴봐야죠.

팀 켈러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는데요. 이분이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을 썼어요. 내가 만든 신, 우리가 우상인 줄도 모르면서 열심히 섬기고 있는 우상들, 그 우상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우리에게 이야기해줘요. 제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우상은 물질의 신이에요. 풍족한 소유, 펑펑 마음껏 쓸 수 있는 소비, 그것을 향한 열망, 그 어떤 우상보다도 강렬하지요. 삶의 성취, 성공, 자아실현 이런 것도 우상이에요. 그 성공이 나를 짜릿하게 만들 때 그것은 우상일 뿐이에요.

세상이 주는 문화, 그것을 향유하는 것도 우상이 됩니다. 그 문화가 나를 지배할 때, 그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문화에 사로잡힐 때 그것은 우상이에요. 심지어는 사랑도 우상이 됩니다. 나의 사랑, 나의 열망으로 갇혀 있을 때 그건 우상이죠. 평생 바라는 내 일생일대의 소원, 간절히 바라는 소망, 그것도 나에게 우상이 됩니다. 내 안에 강한 열망이 있고 강한 소망이 있는데, 그 열망과 소망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을 때, 그 모든 것은 우상이 돼요. 그럴듯한 말로, 사랑이라는 말로 자아성취라는 말로 성공이라는 말로 형통이라는 말로 물질의 복이라는 말로 감추고 있을 뿐이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내 안의 우상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부숴야 됩니다. 십계명 하나하나가 우리에게는 철저한 기도로 다가와야 합니다. 내가 그 계명을 구체적으로 지키느냐 어기느냐가 아니라, 계명들을 통해 내 존재와 내 정체성에 대해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에 대한 진짜 응답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된 고민으로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바라십니다.

바로에게 재앙을 10가지나 보여주시면서 물으셨어요. ‘너는 백성들을 죽일 수 없는 존재야. 그들을 사랑해야 되는 존재야. 너는 그들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되는 존재야.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일러줘야 되는 존재야’라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일러주셨어요. 그런데 바로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는 왕이야. 나는 내 뜻대로 다스릴 거야.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하나님의 물음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십계명은 명령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사랑하시는 온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정체성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묻죠. ‘나는 나의 정체성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십계명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불러주셨나 기도로 고민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나는 불러주신 대로 살고 있는가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그런 사람으로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고 순종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과 하나된,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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