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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하나됨‘진리의 빛을 따르다’ 7(요한복음 17:19-21)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7.09 03:58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Getty Images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진리의 빛을 따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거룩한 하나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예수, 생명의 치유자’라는 주제로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기쁨을 예고하신 직후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기도로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 준비의 핵심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겪는 모든 일들의 궁극적 의미는 이땅에 있지 않습니다. 이땅에서의 일은 하늘 아버지의 뜻과 섭리를 헤아리지 않고서는 그 의미가 온전히 밝혀질 수 없습니다. 그 경험을 제대로 해석하고 소화할 수도 없습니다.

이땅은 하늘 뜻의 무대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법칙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그 의미가 밝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의 활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활동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그 의미가 밝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땅에서의 일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시각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분석만으로는 온전히 해명될 수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 시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시각을 취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취하여 십자가의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17장 1절 하반절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누구를 영화롭게 하다는 말은 그의 위대한 뜻과 본성과 성품을 알아차려 경탄하고 그를 경배하며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의 헌신임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나 우리가 그 앞에 경탄하며 기뻐하게 해주시길 간구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 지신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의지가 얼마나 크신지, 우리에게 베푸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밝히 드러나 우리가 그 앞에 경탄하며 기뻐하게 해주시길 간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무엇입니까? 17장 2절은 그것을 영생이라 표현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의 줄임말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의미이자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주어진 것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주어진 차원이 다른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무엇을 뜻합니까? 달라스 윌라드는 생명을 구체적 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 능력으로 정의합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지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합니다. 쉬임 없이 자기를 보존하고 확장시키고 유전시킵니다.

그런데 이 생명에는 위계가 있습니다. 식물의 생명보다 동물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사람의 생명이 그 위계가 높습니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식물의 속성을 자신 안에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식물에게 없는 운동 능력도 있고, 지능도 있습니다.

사람은 동물의 속성을 자신 안에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사유와 성찰 능력,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습니다. 식물은 동물과 들판을 뛰어다닐 수 없고, 동물은 사람과 문학과 철학과 윤리를 논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생명마다 자기가 지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세계의 수준이 다릅니다. 식물과 동물은 그저 자연세계 속에 거주하지만 사람은 그 자연세계를 내포하면서도 초월해 있는 정신세계에 거주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 속한 영적 세계를 지각하고 이 영적 세계에 반응하고 행동하는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적 세계는 자연세계와 정신세계를 그 안에 내포하면서도 초월해 있는 세계입니다. 이 영적 세계는 하나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를 지각하고 그 나라에 반응하고 거주하는 능력과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며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지은 바 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취급하는 교만 때문에 자기 본질을 부정하고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간명하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가장 완전하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분의 성품이 무엇인지, 그분의 권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통해 친히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요 17:4-8).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지식이나 정보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믿음과는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그 ‘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기노스코’입니다. ‘기노스코’는 사랑으로 하나 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사물을 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과는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개체로 인식합니다. 그 사물은 나에게 속해 있지 않고, 나도 그 사물에 속해 있지 않다는 식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에 대해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물과 하나가 될 순 없습니다. 그저 그 사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거나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그 사물을 이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결부시켜 그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호흡의 원천, 우리 생명의 주인, 우리 행복의 근원, 우리 미래의 소망, 우리 마음의 바탕 등으로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존재와 삶에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앎이 깊어지면,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 본질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 아는 방식도 사물을 아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는 눈으로 보고 양적으로 측정하고 수리적으로 계산하여 지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때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 속에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제함으로써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않고, 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사랑해야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개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우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온전히 몰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그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개방하고, 사랑해야 그가 우리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않고, 그분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감각적 지각, 논리적 추론을 뛰어넘는 사랑의 인식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는 하나님을 아는 최적의 방편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할 수 있습니까? 사람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때 어떻게 하십니까? 게리 채프먼이 말하는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요? 진솔하고 공감적인 대화를 나누지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주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를 돕기 위해 봉사하지요? 그와 자주 접촉하지요?

하나님과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떠올리고 그분을 찬양할 시간을 마련해야겠지요? 하나님과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마련해야 하겠지요.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해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뢰며 우리의 궁금증을 말해야 하겠지요? 물론 동시에 하나님의 응답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노력과 물질을 드리고 헌신해야겠지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늘 가까이 나아와야겠지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와 관련해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무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요,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이 그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자, 인간의 곤궁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응답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분별하여 듣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에서 관건은 하나님의 응답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우리 내면의 깊은 생각과 통찰과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강조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우리 내면에서 떠오르는 깊은 생각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말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들으려 해야 들리니까요. 그것도 수용하고 순종하려는 목적으로 듣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수용할 마음이 없는 사람,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말씀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다음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언어로 말씀하시길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개방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극복되지 못한 내면의 문제들, 고뇌와 혼란 등을 하나님께 아뢰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대해야 합니다.

이런 기본 태도를 기초로 만약 우리 내면을 오가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유독 무게감 있게 우리 가슴을 두드리면서 우리를 평안과 확신으로 이끌고 우리 마음을 유연하게 하고 확장시키면서도 성경의 메시지에 부합된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사랑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 때, 그 앎은 결국 세상에 속박되어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요한복음 17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사랑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 때, 그 앎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곧 하나님과의 하나됨으로 이끕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사랑의 교제는 사랑의 연합, 사랑의 하나됨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똑같아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하나님과의 분리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의지가 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비우기가 수월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이 사랑의 하나됨을 거룩함으로 바꾸어 표현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9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속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나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무한하시나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온전히 머물러 하나님의 거룩을 덧입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어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하나됨입니다.

거룩은 크게 두 가지 뜻을 갖습니다. 구별됨과 온전함이 그것입니다. 거룩은 우리를 구별되게 합니다. 거룩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 줍니다. 이 세상에 살되 이 세상의 논리와 유행과 거짓과 악에 속박당하지 않게 해줍니다. 동시에 거룩은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2절,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곧 거룩함과 온전함은 같은 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 거룩함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17장 2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속에서 온전함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그렇다면 온전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거룩하라는 레위기 19장 2절의 말씀을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표현하셨습니다. 거룩함과 온전함과 자비로움은 이렇게 하나로 통합니다. 사람이 온전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는 누군가를 그의 외모와 형편과 지위와 상관없이 나와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그와 함께하며 그에게 나를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죄와 이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을 때만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비로움은 온전함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3절에서 우리가 온전해지면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온전하여 자비롭게 살아가면 우리 서로 하나되어 사랑의 연합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개인적 구원의 차원을 뛰어넘어 공동체적 구원의 차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되고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하나될 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온 생명의 사랑의 연합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임을 서로 확인시켜 주는 공동체이자, 우리 서로 하나됨을 실현하고 확장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하나됨으로 이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아갑니다. 서로 손해 입히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삽니다. 사회적 룰만 공정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삽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 의존되어 있음에도 독자생존을 추구합니다. 그런 삶이 우리를 얼마나 병들게 하고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애써 외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한 하나됨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 우리가, 교회가 이 세상의 등불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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