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은기와 세진인쇄소. 이곳에서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문서들을 인쇄해 냈다. ⓒ이해학 제공

순창에서 쓰리쿼터 (요즘은 야구나 패션에서 쓰는 용어이나, 미군이 쓰고남긴 지프와 트럭의 중간급 짐차. 적재량이 4분의 3톤)에 올랐다. 장사꾼들이 저마다 커다란 봇짐을 먼저 싣고 짐보따리 위에 사람들이 따닥따닥 올라붙었다. 나도 그사이에 끼어서 감격의 유학길에 올랐다.

남원 가는 길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즐거웠다. 순창을 떠나 적성 채계산을 지나 얼마 있다가 병재(비홍재)에 오르니 눈이 펑펑 내렸다. 지금 가보면 참 과장도 심한 말이지만 우리가 아흔아홉 고개라 부른 병재 고개를 차가 흔들리며 굽이칠 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몇 번씩 앞뒤로 전후진을 하다가 겨우 빠져나오는 것이다. 한쪽이 깊은 낭떠러지 길이기에 목숨을 걸고 가는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쓰리쿼터에 유리창을 닦는 와이퍼가 고장이 나서 눈이 쌓이면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운전사는 자주 차를 세우고 내려가 수건으로 닦고 조금 가다 세우고 닦는 것이다. 나는 이 경험을 잊지 못해 후에 목회할 때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다. 우리의 죄도 그날 쌓인 것을 그날 풀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말이다.

그해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었다. 사람들이 시험이 어렵더냐고 물으면 창피했다. ‘똥통학교’라는 낙인이 붙는 것 같았다.

어쨌든 개학을 했는데 나에게는 교복도 모자도 가방도 없었다. 어머니한테 사달라고 했더니 이웃집에서 헌 교복을 빌려주고서는 더 못한단다. 어머니가 그렇게도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책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메었으나, 모자는 해결할 길이 없고 나만 모자를 안 쓴 것 같아서 나 스스로를 왕따시켰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아이스케키 장사였다. 아이스케키를 파는 사람을 졸졸 따르다가 골목에서 붙들고 어떻게 하면 나도 아이스케키를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광한루 문 앞에 있는 공장에서 받아서 팔면 된다고 의외로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자기도 학교에 갈 때는 학교 앞 보리밭에다 통을 숨기고 학교에 간다는 노하우도 가르쳐 주었다. 그가 바로 평생 친구가 된 ‘강은기’이다.

1956년 광한루는 초여름부터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광한루 앞에는 수학여행 버스가 도착하면 하얀 카라에 검정 치마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왁자지껄 생기가 도는 때,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를 높인다. “아이스케키! 어름과자!” 목마른 학생들은 나를 찾았고, 나는 다시 공장으로 달려가서 아이스케키를 받아와서 팔았지만 때로는 아이스케키가 아직 굳지 않아 발을 구르는 날도 숱하게 많았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달려가서 아이스케키 통을 잡아야 한다. 오후에 가면 통이 없어 장사를 못 하기 때문이다. 우선 열 개만 사서 광한루 근처에서 팔다가 다 못 팔아도 등교 시간이 되면 학교에 가야 했다. 내가 입학할 때, 우리 남원중학교는 시내 남원여중 근처에 큰 일본 요정터에서 공부하다가 향교리로 이사를 한 첫해였다. 학교에 가서는 매일 운동장 흙을 나르고 풀을 뽑았던 추억만이 남는다.

나는 학교 앞 보리밭에다 아이스케키 통을 숨기고 교실에 들어간다. 수업이 끝나고 통을 찾으면 몇 개 남아 있던 아이스케키가 다 녹아버렸다. 어느 날에는 네 개가 남았는데 그냥 녹이기가 아까워서 수업 들어가기 전에 아이스케키를 다 먹고 들어갔다가 배탈이 나기도 하였다.

아이스케키 장사로 돈 버는 것은 쉽지 않다. 가끔 아이스케기 장사로 고학하였다고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영웅담을 과장한 것이리라. 나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서 모자와 가방을 내 손으로 산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와 나는 새벽부터 발발거리며 뛰어다녔지만 우리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도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 강은기를 위해 상징물 하나 남원에 세우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이해학 제공

나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서 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강은기라는 친구를 만난 것이 내 인생에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도 한 살 많았다. 한번은 광한루 밑 바닥에서 둘이 만났다. 얼굴은 햇빛에 검게 타고 땀에 젖어 찌푸린 흉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팔기만 하지 말고 한번 먹어 보자! 아이스케키!”
“그러자!”

해서 서로의 통을 열어보니 두 사람에게 한 개의 아이스케키 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이 서로 한 번씩 베어먹고, 한 번씩 빨면서 나름 아이스케키 파티를 한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강은기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가 을지로 인쇄공이 되었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해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주인과 다투고 인쇄소를 전전할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후에 기독교방송 사장이 된 권호경 목사가 비밀리에 문건을 만들 인쇄소 찾기에, 강은기를 소개하였다. 강은기는 모든 일꾼을 퇴근시키고 혼자서 밤새워 일을 하였다. 추운 겨울에 언 손으로 문선을 하고 조판을 짜서 교정을 보아 인쇄와 제본까지 하여 기독교회관에 납품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1972년 한국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다. 이후에 권호경 목사의 소개로 학생운동권의 성명서 인쇄물을 전담하였다. 박형규 목사의 “해방의 길목에서” 출판 이후 11회나 경찰서 중앙정보부를 들락였다. 그는 김재규 장군 최후진술서 인쇄사건이나 나의 수배를 도운 일 때문에 고문도 당하고 인쇄기기마저 몰수당했다. 한마디로 망해버렸다. 누구도 도와주는 이가 없이 홀로 나약함을 짊어지고 갔다.

“췌장암으로 60살을 일기로 생애를 마쳤을 때 장례위원회의 고문은 고은, 박형규, 한승헌을 비롯한 10명의 민주 인사였고, 공동장례위원장은 김근태, 이부영, 이창복, 이해학, 지선, 함세웅이었다. 집행위원장은 권형택이었고, 장례위원으로는 유인태, 정동영, 정대철 등 184명이 참여하였으며, 호상은 정동일, 장영달이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양희선과 아버지의 세진출판사를 이어받은 딸 강신영과 아들 강동균이 있다.” (디지털남원문화원 자료)

내가 알기로 일개 인쇄공의 장례식에 현직 국회의원이 40여 명이나 참석 한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학생운동 때 강은기가 외상으로 인쇄해준 유인물로 운동하고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나, 막상 국회의원이 되어 그 많은 인쇄물 한번 그에게 주지 못한 죄책감을 장례참석으로 퉁쳤던 것이다.

남원에는 그의 처남인 양희성 시의원이 있었지만,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남원사람 강은기를 기념할 상징물 하나 남기지 않았다. 남원에 강은기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난 기념탑은 못 세웠지만, 나는 지금도 그와 함께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올랐던 ‘금암봉 94계단’을 오른다.

광한루도 성춘향의 초상화가 바뀐 것보다 더 많이 달라졌다. 잉어 떼가 놀고 원앙이 헤엄치며 건물도 여러 채 들어섰다. 그네가 달렸던 나뭇가지는 이미 없어지고 줄 서서 서로 먼저 타려고 안달하던 여학생들도 지금은 없다. 관광 필수코스였던 광한루에 수학여행 차가 오지 않은 지 얼마인가.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서 남원에서 내려 광한루를 들리던 등산객이 구례역이나 곡성역으로 돌아버린 물줄기를 바꾸는 길은 없는가?

나는 윷놀이 세계화 운동과 남북이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에 전념하면서 오작교 위에 새겨진 윷판 암각화를 중시한다. 칠월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 위에서 부슬비를 맞으며 만나는 자리에 윷판이 나타나는 스토리를 들려주려 서울에서 관광버스까지 불러 들인다. 나는 광한루를 춘향이를 <업고 놀자>에서 <벗고 놀자>로 마약같이 관능화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왁자지껄 윷놀이하는 편안한 쉼터였으면 좋겠다.

이해학 목사(윷놀이 세계화추진위원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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