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매우 간결 명료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대비하는 가운데,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에 마땅히 자녀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말씀의 요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과 영을 대비하는 관점을 견지하며 영을 따르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육적인 지향과 영적인 지향의 갈등을 분명히 대비하며 진정한 삶을 역설하는 데 그 참뜻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삶,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삶의 법칙에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미 주어진 질서 안에서 저마다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을 마치 진리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로지 주어진 질서 안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 삶의 방식 안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조차도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합니다. 이 경우 결국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고 거기에 노예처럼 매여 사는 삶입니다. 이 삶의 방식 안에서 언제나 답은 자명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자명한 답을 따르는 것만이 인간이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호령하시는 주인이요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의지를 펼칠 수 없고 스스로 물음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때로 신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렇게 믿는 하나님이 사실은 자기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경우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의 실상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그와 다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배타적 독점의 욕망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데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했다는 점에서 혁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가 아니라 자녀로 삼습니다.

노예와 자녀의 삶이 얼마나 다릅니까? 노예의 삶에서 자녀의 삶으로의 변화, 육신을 따르는 삶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의 변화에 그리스도교의 혁명이 있습니다. 노예의 삶은 언제나 주어진 명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 명령이 잘못되었어도 잘못되었다고 반문하면 안 됩니다. 반면에 자녀의 삶은 다릅니다. 부모의 신뢰와 사랑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삶입니다. 얼마든지 부모와 대화할 수도 있고, 그런 만큼 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어머니와 대립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의 주인이 아니라 자녀의 어버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된다는 것도 딸과 대립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 자체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듯이 자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버이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또한 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노예들 사이의 관계는 주인을 중심으로 기능적인 역할 분담을 이행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자녀들 사이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침묵의 복종자이거나 노예들 사이에서 침묵의 감시자 또는 경쟁자가 되는 관계를 벗어나, 어버이 되시는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형제자매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며 격려하는 관계를 이루는 삶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과 거의 다르지 않은 말씀을 사도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갈라 4:1~7). 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씀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삶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해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위계질서,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하는 차별적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부정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수동적 노예적 삶을 요구하는 넘어 책임과 자유를 향한 분투가 필요하다. ⓒGetty Images

오늘 본문 말씀은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놀라운 진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바’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을 그렇게 호칭하였던(마가 14:36) 뜻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대로 이어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친근한 어버이가 되신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는 삶은, 번뜩이는 욕망의 눈빛으로 누군가를 밀쳐내고 내가 앞서 나가려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아끼는 삶의 태도로 이끕니다.

그 삶은 위선으로 자신의 욕망을 가리지 않고, 근거 없는 믿음으로 진실을 호도하지 않습니다. 그 삶은 진솔하게 자기를 먼저 돌아보는 삶이요, 언제나 진실에 대한 갈망을 끊이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문의 여지 없는 것으로 덮어두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께 묻는 가운데 진정한 그 의중을 묻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그 삶은 자기중심적일 수 없고 언제나 진실을 향해 열려 있고 타인을 향해 열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가 예외 없이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실로 경험하는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근심과 괴로움에 싸일 때가 많습니다. 내 삶을 추스르기에도 바쁜데, 곁에 있는 사람을 배려할 틈이 어디 있느냐고 볼멘 소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우선 위로받고 싶고 평안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 기대가 잘못된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두의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하나님을 어버이로 여기며 서로 형제자매로서 삶을 구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진실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의 영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다는 말씀을 잘 새기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 내 곁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님과 같은 마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마음을 헤아려 주고 나를 이해해 주는 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신뢰를 나누며 나아가서는 자유로운 책임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은 노예가 주인의 명을 받들어 살아가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 모든 것이 혼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좌충우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진실을 찾아가는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그 가운데서 저마다의 삶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체감하는 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진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맺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처한 조건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8:17, 새번역). 자녀요 상속자로서 희망을 강조하는 번역입니다.

그 번역이 모두가 처한 조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면 다른 번역을 참조해 볼까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7, 개역개정).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다는 진실을 말미에 강조하는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누리는 데 고난의 과정을 동반한다는 뜻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8월 28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와 한국민중신학회가 공동으로 연 세미나에서 아주 흥미진진한 연구 주제를 두고 함께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김홍중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의 “민중과 페이션시 – 오클로스에서 생태계급까지”라는 주제였습니다. ‘민중과 견뎌냄’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길고 복잡한 논의는 줄이고 간단히 말하면,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지 그 과정을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부당한 일을 겪게 되는 데서 나아가 겪어내고 나아가 뭔가를 하게 되고 누군가 행동하게 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통찰한 내용입니다. 그 통찰을 민중신학이 일찍이 깊이 통찰한 것을 발견하고 사회학자로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 이야기에서 거꾸로 신학자로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주제의 초점은 어떤 일을 겪게 됨의 사태가 단지 수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요 능동적 행위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당하는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그렇게 겪게 되고 겪어내는 데서 비롯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와 민중에게서 일어난 일이 그 사건의 전형이라는 진실은, 모든 생명이 신음하는 오늘 인류세 시대의 세계 가운데서도 충분한 영감을 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능동적 주체만을 강조해 온 사회학 이론이 수동적 대상으로만 여겨져 온 이들이 일으키는 사건의 의미를 통찰한 민중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노예의 영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저 헛된 약속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삶의 여정을 깊이 있게 통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그 답이 주어져 있는 진실을 새기고 있습니다.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자 분투하는 그 과정을 진정한 기쁨으로 여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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