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한 구절을 꼽는다면 단연 본문 말씀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5:1) 그 말씀의 뜻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간결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앞서서 유대인을 향하여 율법 아래 있는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 후, 이제 믿음 안에서 그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자녀로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 아래서의 삶은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는 삶이라고 말합니다(3:23~25). 개역이 ‘몽학선생’이라고 번역한 것을 새번역은 ‘개인교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선생’이든 ‘교사’든 그 의미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원문상의 단어는 정확하게 말하면 그와는 다릅니다. 그리스어로 ‘교사’는 ‘디다스칼로스’인데 반해 여기에 등장하는 ‘파이다고로스’는 학교에 학동과 함께 갔다가 돌아오는 ‘노예’를 말합니다.

이 노예의 임무는 학용품을 날라다 주기도 하고, 학동을 보호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학동들은 사춘기까지 이 노예의 감독하에 있었습니다. 이 역할은 흔히 회초리로 상징되었고, 굳이 말하자면 ‘훈육’ 정도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파이다고로스’라는 이야기는 인간이 타율적 규제와 감독을 받아야 하는 미숙한 상태에 있을 때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그 역할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제한된 것일 뿐이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타율적 규제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을 겨냥해 말했던 바울은 이 대목에 이르러 이인칭 복수로 그 주어를 바꾸면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곧 이방인들의 지위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은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에게도 계승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말하는 바울의 주장은 흥미롭고 급진적인 표현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3:27).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합류하는 절차와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세례가 바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세례에 대해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기보다는 다소 엇갈리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여기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 하나의 절차로서 세례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4:6)의 ‘아들의 영’에 대한 언급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불분명하고, 고린도전서(1:13~17)를 볼 것 같으면 세례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바울은 당시 행해지고 있는 세례의 의미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하나의 의례로서 세례를 강조했다기보다는 그 실질적 의미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가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지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합류하는 절차로서 의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의 역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다고 말합니다. 당대의 언어적 관례를 통해 볼 때 그 표현은 신적 변형의 사건, 곧 곧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뜻합니다. 바울이 강조한 것은 그 점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은, 기존의 모든 대립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사이에 종교적·문화적·사회적 차별이 없어집니다. 엄연히 존재하던 차별의 장벽이 사라지고, 따라서 그 차별 관계 안에서 의식하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외적 규정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옛 세상 질서에서의 특징인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차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갈라 2:19).

바로 여기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의 핵심적 요체가 담겨 있고,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급진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 곳곳에서 변형된 형태로 이 주장을 반복합니다(로마 10:12, 골로 3:11 등). 이 주장은 확실히 종교적 차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적 차원까지 포함한 것으로, 비단 바울에 의해서만 주장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고대 세계의 많은 현자들에 의해 공유된 이상이었습니다.

바울에게서 그 주장이 특별한 의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상을 실현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이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없었던 철학자들에게서 그 이상은 그저 내면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예컨대 ‘철학자인 노예는 자유롭다 불리는 반면 정욕의 노예인 자유인은 결코 자유롭다 불릴 수 없다’는 식으로 내면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반면에 바울에게서 이 주장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 법에 아래 노예로 있던 유대인, 욕망 아래 노예로 있던 이방인, 이 둘 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을 얻게 되었다. ⓒGetty Images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흔히 그리스인이 ‘그리스인과 야만인’을 구별하는 어법을 변형한 것으로, 율법 아래서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여겨졌던 유대인이 그 특권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문명과 야만,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모든 사람이 동등해진 현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차별이 없다는 점은 철저하게 관철되었습니다.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두 동등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 주장이 당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현실적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구현되었는가, 나아가 정치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은 논란거리기는 합니다.

예컨대 빌레몬서를 보면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도망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주장과 동일한 메시지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 주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냅니다. 바울은 현실적으로 오네시모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에서 고통스러운 권면을 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당대의 정치사회적 기존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 피를 부르는 진압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다시 빌레몬의 집에 머물게 되더라도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서” 머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빌레 1:16). 노예제도가 현존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형제애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도 자체를 철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존하는 조건들을 철폐하는 것에 앞서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내적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의 조건과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저 이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제도의 구속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새로운 관계를 유념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의 현실적 권면이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이 주장은 소종파들과 수도사들, 그리고 세속적인 입법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그 역사를 쉽사리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그 말씀을 철저하게 구현하고자 해온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서 법적으로 노예제도가 철폐되기 이전에 먼저 노예들을 해방한 퀘이커교인들의 실천도 그 한 예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한 진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의미 없습니다. 그러므로 차별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관념상으로 너무나 자명한 이 말씀이 역사적 맥락을 헤아릴 때 그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다른 서신, 예컨대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주장 자체만 보더라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고전 11:2~11). 더욱이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진 국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코 남성 중심의 성차별 역사가 뒤집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 점에서 본문 말씀의 주장은 회의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관습 때문에 현실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울의 태도를 빌미 삼아 본래 주장의 진의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지속되어 온 남성 중심의 역사 때문에 말씀의 진의를 왜곡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 말씀은 성차별의 폐지를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최초의 교설입니다.

그러기에 성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본래 말씀의 진의를 깊이 숙고하고 그 뜻을 실현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어 왔습니다. 초기 교회 시대 철학자들뿐 아니라 신학자들도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해온 사실을 알면 오늘날 우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 나아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는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여기는 생각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최초의 인간 존재에 관한 창세기 이야기에 대한 해석에서, 심지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 문제의식은 반영되었습니다. 이는 특정한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또는 사회적으로 고정된 성적 역할에 상관없이 그 어떤 존재이든 인간을 인간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안목을 열어줍니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마주하게 된 놀라운 진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그에 따른 통념에 의존한 그 어떤 차별도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마치 유대인들이 선민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누립니다.

교회가 그 이상을 저버린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엄연히 세상 한가운데 있기에 때때로 현실적인 고려를 할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현실적 고려를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적인 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향한 믿음에서 곁길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을 올곧게 이루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본을 따르면 됩니다. 사랑을 이루는 삶입니다. 우리가 마음 써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가 진실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 기쁨을 세상에 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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