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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대~한민국’에 경고를 보내는 카나리아민중신학회·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공동 기획 '이주노동자와 민중'
황용연 | 승인 2007.04.02 00:00

몇 년 전에 우연히 보게 된 "느낌표" 프로그램 하나가 생각난다. 이주노동자들이 고국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 올 수 있게끔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프로그램의 조력자로 이주노동자 인권사역을 열심히 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나오는 걸 보고 공중파 TV에 저런 분도 나오네 했던 기억도 있다.

방금 이야기한 TV 프로그램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 사회의 공식적 담론의 영역에서 이주노동자가 직접 대상이 될 때에는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연민의 대상이 되거나 '인간시대'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대상이 되거나일 것이다. 물론 그 뒷편에는, '외국인 범죄'라고는 말해도 '한국인 범죄'라고는 말하지 않는, 간접적이고 은근해서 악질적인 편견이 존재하지만.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은, '보호소'에서 '보호'는커녕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생긴다는 것이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연민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특히 여수보호소화재사건과 같은 안타까운 사건을 언급할 때에는, '이주노동자를 억압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라든지, '폭력단속과 강제추방 정책으로 일관하는 반인권적인 한국 정부' 등의 말이 종종 나온다. 물론 필자도 이런 말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주노동자를 억압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저 말은 일단 이주노동자 억압과 차별의 문제가 '민족'이 '외국인'을 차별해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히려 '민족'/'국가'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억압과 차별의 구조가 '외국인'을 핑계로 하여 작동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사실 그렇다면 '민족주의'란 것이 원래 내부의 억압과 차별을 봉합하려는 시도이니, 전혀 다른 방향에서 '민족주의'의 문제라는 지적이 맞을 수 있기도 하겠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폭력단속과 강제추방의 반인권정책'이란 말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겠다. 단속과 추방을 당하는 개개인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폭력단속이고 강제추방이며 그러기에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일이겠지만, 한국 사회의 차별의 구조란 맥락에서 본다면, 폭력단속과 강제추방은 이주노동자 집단을 제거하는 효과가 아니라 오히려 존속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폭력단속'과 '강제추방' 같은, 직접적인 폭력 그 자체가,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사용하는 집단들에게는 이주노동자 차별을 유지시켜 주어서 그 차별된 조건으로 이주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근본 요인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존재해 왔던 그 시간은, 흔히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노동차별화가 계속 심각해져 온 시간이기도 했으며, 이주노동자는 바로 그 노동차별화의 가장 심각한 예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노동차별화는 이제 'GNP 2만 달러'를 바라본다는 경제적 발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방책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경제적 발전의 결과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외치게 되었고, '한미 FTA로 세계 최대의 미국시장 정복하기'까지 꿈꾸게 되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뒤에는 누구나 '사회양극화'에 대해 한 마디 안 할 수 없게 된 현실이 깔려 있다.

예전 광부들은 지하 갱도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꼭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카나리아가 질식할 지경이 되면 위험수위에 다가왔다는 경고가 되기 때문이란다. '보호소'에서 ‘보호’는커녕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일까지 겪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과연 한국 사회에 경고를 보내는 카나리아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주노동자가 보내는 카나리아의 경고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이주노동자를 ‘손님’이 아니라 ‘우리’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주노동자가 한국 사회의 노동차별화를 당하는 당사자로서 겪는 고난을, 그 심각성에 대한 경고로 듣고, 그 노동차별화 위에 서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자신감에 대한 경고로 들을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고를 들은 사람들, ‘사회양극화’의 한 극으로 몰리고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등으로 노동차별화를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로 연대할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성서는 고난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서는 부활은 그 전까지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주노동자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이 아닌 한국 사회로 부활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황용연 /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대학부장

황용연  hyysca@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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