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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주기도 탐구 1
김진호 | 승인 2005.10.16 00:00

유대교 기도문과 주기도문의 차이는 짧은 부름구절에 있다!

마태오복음  6장 9~13절과 루가복음 11장 2~4절에는 예수가 가르쳐줬다는 기도가 서로 약간 다르게 기억되어 있다. 그 첫 구절은 공히 신을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한다. 마태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고, 루가는 그냥 “아버지!”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루가의 것이 예수의 말 그 자체였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꼭 그렇게 단정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다.

이든 저든 간에 이 부름 구절은, 예수 시대에 유대교 회당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 기도문과 비교해 보면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의 취지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아브라함의 하느님, 에사오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천지의 창조자시고, 우리의 방패시며, 우리 조상들의 방패십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아브라함의 방패시여!

당신은 굳세고 강하셔서, 영원하시며,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산 자들을 붙드시며,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옵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는 분이시여!
당신은 거룩하시며, 당신의 이름은 경외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 외에는 어떤 신도 없습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거룩하신 하느님이시여!

세 문장으로 된 부름 구절들 속에는 유대 라삐들의 역사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하면 이스라엘의 민족정체성의 구심으로서의 신에 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는 오랜 동안 식민지 백성으로서 제국들에 의해 난도질당한 민족의 피의 절규가 들어 있고, 절절한 구원의 소망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지극히 간소하다. 필경 예수 자신도 알았을 이 유대교 기도문의 긴 역사철학적, 민족사적 정체성을 담은 모든 말들을 다 잘라버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달랑 신을 향한 부름만을 남긴다. 곧 예수의 기도는 역사를 생략한다. 왜 역사를 생략했을까? 바로 이 점이 주기도의 부름 구절의 요체다.

바리사이파가 만든 율법은 엘리트만이 아니라 전대중이 지켜야 할 규율로 만들었다

유대교 회당의 기도문을 만들어낸 주역은 바리사이였다. 그들은 식민화된 민족의 정체성 재무장화를 추구하는 대중운동을 일으켰고, 대중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민족사의 명실상부한 주체로 부상한 존재였다. 그들 중에는 중앙에 진출하여 귀족들만 참여했던 성전 원로원(산헤드린)의 의원이 되기도 했고, 또 유명한 라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촌락의 회당에서 활동하는 마을 유지였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중앙에서만 벌어졌던 민족사에 관한 모든 담론들은 바리사이에 의해 수정된다.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그들의 운동은 대중을 민족사의 주체로 이끌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율법의 효과였다. 율법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사제들만의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규율을 대중적 규율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앙의 엘리트들만의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규율이 바리사이에 의해 전 민족이 지켜야할 규율로 재해석된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의 주체로 중앙의 엘리트만이 아니라 주변부 백성 또한 포함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율법이 배제했던 사람들이 예수에게는 관심사였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예수에겐 문제였다. 예수는 회당 안에서 율법을 두고 바리사이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보기엔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이기보다는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법이었다. 왜 이런 시선의 차이가 발생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는 율법에 의해 추방당한 자들의 시선에서 하느님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이방인 같은 자, 공동체의 떳떳한 주역으로 평가될 수 없는 자, 가난한 자와 이른바 ‘죄인들’, 거지, 세리, 창녀 등등이 그의 주위에 몰려 있었고, 바로 그들과 예수는 함께 식탁을 나누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이들은 바리사이가 만들어 놓은 ‘내적 국경’의 외부로 밀려난 자들이다. 반외세 민족주의자들인 바리사이는 율법을 통해 율법에 규율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눔으로써, ‘외부의 외세’만이 아니라 ‘내부의 외세’를 솎아내려 하였던 것이다. 이들 내부의 외세는 유대민족이 식민화되어 고난을 겪어야 했던 내적 요인이며, 따라서 이들은 유대 민족사의 ‘내부의 적’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유대 민족사의 신으로 하느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이 민족사의 ‘내부의 적’이 곧 죄인들임을 의미한다. 이들 죄인을 솎아내고 하느님의 남은 자들을 통해 민족사를 재건하겠다는 것이 바리사이의 역사철학이고, 그들의 기도문은 바로 이것을 담고 있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나라는 바로 이런 죄인들을 부르는 나라다. 그것은 민족사에 대한 거부이며, 민족사가 담고 있는 배제주의에 대한 항거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기도의 부름 구문은 유대교의 그것처럼 역사의 주역, 역사의 승자의 시선이 아니라, 역사의 패배자, 역사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기도임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패배자, 죄인들의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냈다. ‘신의 화육’,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정수다. 그런데 그이는 역사의 승리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낮은 곳으로 추락한 이다. 그는 지극히 낮은 자들의 친구이며, 지극히 낮은 자들만이 겪는 방식으로 죽임을 맞이한다. 그가 죽을 땐, 엘리트들만이 그의 적대자가 아니었다. 대중도 그를 죽이라고 외쳤고, 제자들조차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며 몸을 피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라던 신조차도 철저히 침묵했다. 여기서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부재한다. 예수는 역사의 실패자를 상징하며, 신은 그와 함께 권력에 의해 죽임당하는 존재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기도 속에 ‘아버지!’ 부름의 혼이 담긴다.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약자의 편에 서서 기도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다. 어느덧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이 역사를 만드는 자들이 되었다. 아니 실상은 거꾸로다. 역사를 이끄는 이들이 예수를 아울러 추종했다. 하여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주역들의 신앙이 되었다. 그것을 어떤 이는 ‘콘스탄티누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주의 기도는 그런 전환을 경유한 그리스도교의 모범적 기도문이 되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런 승리자의 종교를 선택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기도할 때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작의 말 속에는 어쩌면 이런 말들이 생략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역사의 실패자가 아니어서 감사합니다.” 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다시 전지전능한 ‘빅파더’가 되었다. 예수의 ‘아버지!’ 부름의 혼은 유실되었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유실된 예수의 정신을 다시 담기 위해 “(우리) 어머니!”라고 기도를 시작하자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였다. 한데 다른 페미니스트는 그 말 속에는 가부장적 가족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인 ‘빅마더’가 도사리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아버지’ 못지않게 ‘어머니’도 승자의 역사에 오염된 함의를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승자가 만들어온 역사에서 그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이름이 있을까? 얼른 찾아지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불가능한 주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수의 정신을 담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다. 불가능한 데서 가능한 것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이름 속의 승자의 가치관을 소독해내는 일이기도 하고, ‘어머니’를 정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무수한 이름들, 그 속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권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인 것이다.

비로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또는 “(하늘에 계신) 님이여!” 등을 자유롭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이 창조는 계속되어야 한다.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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