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섭(성남주민교회)

▲ 이춘섭 목사

87년 여름은 정말 뜨거웠다.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처럼 전국 방방곳곳에서 열화와 같은 민주화의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폭력적인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눌려있던 민중들의 분노와 맺혔던 한이 박종철의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폭발되었다. 많은 양심세력과 젊은 학생들이 잡혀가서 무차별 폭력 고문으로 감옥에 가거나 죽어갔는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민중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단식 농성 중 사전 답사와 도상 훈련

1987년 6월의 민주화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서 전두환 정권을 궁지로 몰았다. 급기야 7-8월에는 전국의 사업장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며,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열악한 근로조건 아래서 숨죽여 살아오던 노동자들의 욕구가 분출되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 상 유래가 없는 노동자들의 욕구분출이요, 노동현장의 대투쟁이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1987년 9월 5일 비상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최근 노동쟁의의 실상과 특징>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노동자들의 쟁의를 ‘비윤리적, 패륜적’ 행위로 매도하고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여론몰이를 전개했다. 

결국 대부분의 교우들이 현장 노동자들이었던 민중교회 목회자들, 7-80년대 산업선교를 담당했던 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이 중심이 되어, 탄압받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사회에 바로 알리기 위한 기도모임을 갖게 되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단식농성기도회에 들어갔다.

농성 이틀째이던가? 전경련 회장단을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목회자들의 입장을 전달하기로 했다. 일부 목회자들은 여의도 전경련회관을 사전 답사하며, 우리 일의 성공을 위해서 철저하게 도상연습(?)을 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와 정당한 쟁의행위를 세상에 똑바로 알리기 위해서 이 일이 실패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산뜻한 정장차림으로,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지정된 장소로 모일 것을 약속하며 결의를 다졌다.

전경련 회장실에 들어선 23명의 목회자들

1987년 9월18일 오전. 우리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약간의 떨림과 긴장하는 모습으로 하나둘 전경련 회관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약속시각에, 2층 회장실로 몰려 들어갔다.

정장차림의 우리들은 일시에 회장실을 열고 들어가, 회장단 원탁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당황한 직원들은 "나가라"고 소리치다가 세 불리를 알아차리고 즉각 영등포경찰서에 연락을 하고, 또한 직원들을 불러댔다. 삽시간에 회장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들은 차분히 둘러앉아 즉석 집회를 하면서, 우리가 전경련 회장실에 찾아온 이유를 주장하며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조화순, 장성룡 목사님의 감동적인 연설과 찬송으로 드린 그날의 집회는 지금도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회장단 면담을 요청했지만 잘 안되었다.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사복경찰들이 대거 진입하여 농성 중인 목회자들을 모두 영등포경찰서로 연행하면서 상황은 일단 끝났다.

▲ 목회자 23명이 전경련 회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경찰이 나타나 연행하고 있다. 사진은 당시 신문 보도 사진.

연행된 스물세 명의 목회자들은 일체 함구했다. <목회자 전경련회관 점거농성>으로 석간에 대서특필되면서, 영등포경찰서는 소란스러웠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계 관계, 배후세력을 놓고 밤샘조사를 하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이름 석자만 적어놓고 밤새 조사관과 씨름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틀 동안 조사를 받다가 조화순 목사, 장성룡 목사(강동,정의평화실천목회자협의회 의장) 이근복 목사(영등포산산업선교회 총무), 이광호 목사(안산,원곡), 이춘섭 목사(성수) 등 다섯 명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다음날 풀려나왔다. 목협의장단과 산업선교회 관련 책임자였기 때문에 선별 구속되지 않았나 싶다.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결성의 계기

하여간 다섯 명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삼개월 수감되었다가 대통령선거(12월16일)가 끝나던 시기에 재판을 받지 않고, 구속정지로 석방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광주추모집회 건으로 전두환 정권 초기에 2년, 말기에 3개월 동안 구속 수감 생활을 통해 나는 전두환 정권과의 질긴 악연을 맺었다.

전경련 점거농성사건은 민중교회와 민중목회자들의 역량이 모아서 기독교운동의 새 기틀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88년에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이 결성되었다. 민중교회는 지역의 노동조합, 민중운동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하면서 지역센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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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장 생명선교연대 창립 20주년 기념문집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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