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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의 빛과 소금
고상균 | 승인 2007.07.03 00:00

일본 서부의 아름다운 항만도시 고베(Kobe, 神戶)는 1995년 1월 17일 일어난 대지진으로 순식간에 6,4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재앙으로 인해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충격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한신대지진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베 지진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동경대지진 이후로 일본 최대의 지진이었습니다. 150여년간 한 번도 큰 지진을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지진 안전지대라 생각한 고베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진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지진의 이유야 여러 가지이고 또 여러 학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도시의 지나친 비대화와 인공구조물의 지나친 건설이 한 원인이라는 학설은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판과 판으로 되어 있고 지오이드 평면이 틀린 지각에서 산의 돌들을 옮겨 평지에 밀집하여 대규모 인공 구조물을 건설하는 것은 결국 지구 내부의 에너지의 흐름과 운동을 교란 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고배와 오사카는 동경 못지않은 메트로폴르탄이며, 동경에는 없는 인공섬이 고배에 두 곳(롯코 아일랜드와 포토 오일랜드) 그리고 오사카에 한 곳(간사이 공항)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진은 자연 재해이기도 하지만, 바벨탑과 같은 인재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제가 오사카와 고베를 처음 찾은 것은 지진이 일어난 해 봄이었습니다. 정농회 회장을 역임하신 정상묵 선생님과 몇 분의 기독교농민회원들과 함께 애농회와 노아방주회 등을 둘러본 뒤에 정상묵 선생님과 둘이 남아서 고베의 청년학생센터로 히다 유이치 관장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오사카에서 고베 청년학생센터까지는 40분도 안걸리는 거리인데,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한국철도에 해당하는 JR과 사철인 한큐센과 한신센을 비롯한 모든 교통수단이 지진으로 인해 부분 부분 두절되었기 때문에 몇 번을 갈아타면서 2시간 이상을 걸려서 갔었습니다.

제3자의 주관적 감상인지 몰라도 잘 웃는 일본인이지만, 마스크를 쓰고 가는 사람들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지진의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었습니다. 곳곳에 파괴된 채 방치된 집들, 무너진 건물들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베청년학생센터에 들어섰을 때 그 곳의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활기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에너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에 히다 유이치 관장이 있었습니다.  

지진이 나자 고베청년학생센터는 하숙을 하던 집이 붕괴되어 갈 곳이 없어진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이 새 하숙집을 구할 때까지 잠자리이자 연락소가 되어 있었습니다.(지진이 일어나자 고배 지역의 교회들과 성당들이 대부분 그런 역할을 했는데, 가장 큰 교회는 건물 유지를 위해서 그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교회 건물의 우상화에 대한 한국이나 일본의 공통적인 인식에 가슴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히다 관장
ⓒ 장익성 /에큐메니안
히다 유이치 관장은 그 후로도 지진으로 인해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혹은 경제적 손실을 입은 자들에게 일본 정부의 지원에서 유학생들과 불법체류자들이 제외되자, 히다 유이치 관장이 원고가 되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재판 결과는 피지원 대상이 불법체류자이기에 법적으로는 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인들에게 ‘지진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라는 사실을 알림으로서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모금을 이끌어 내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기독교단이 운영하는 고베청년학생센터는 그리 화려한 건물이 아닌 작은 건물이지만 간사이(오사카-도쿄-고베) 지역의 양심적인 NGO의 중심이자 간사이 지역 유기농 운동과 소비자 운동의 중심입니다.

거기에서는 식료 환경 세미나, 조선사 세미나, 그리스도교 세미나, 한국어/조선어 교실, 귀농학교, 외국인을 위한 일본어 살롱, 일본어 볼런티어 등의 프로그램이 연중 기획되어 열리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운영하는 로코 장학기금은 위에서 말한 고베대지진 당시에 피해를 당한 외국인 유학생들을 돕는 운동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 취지를 잠시 소개하면 로코장학기금은、일본이 저질렀던 침략으로 인해 큰 피해를 가한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고, 게다가 새로운 일본과 아시아의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배 대지진 당시의 모금을 발판으로 지속적으로 재일 아시아 유학생을 돕는 기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혜자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베청년학생센터는 고배 지역의 여러 NGO의 사무실 혹은 연락소를 겸하고(★표시) 있거나 고베 청년학생센터가 관계하는 곳(◆)의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神戸港에 있어서戦時下朝鮮人・中国人強制連行을調査하는会,

★外国人의生存権을実現하는会(ゴドウィン裁判の原告/弁護団を中心とする会)

★神戸電鉄敷説工事朝鮮人犠牲者을調査하고追悼하는会

★朝鮮人・中国人強制連行・強制労働人을 생각하는 全国交流集会/世話人会

★強制連行調査 네트워크

★むくげ(無窮花)의会(朝鮮의歴史、文化의공부하는 모임『むくげ愛唱歌集』等を発行)

★SCM(学生기독교運動)協力委員会

★神戸・南京을 연결하는 会(남경대학살을 기억하는 모임)

★반전 운동 회

★食品公害을追放하고安全한먹을거리를 찾는 모임

★神戸大学YMCA

★強制動員真相究明네트워크

★多民族共生教育포럼

★アジア労働者交流集会in神戸 

◆日本基督教団(兵庫教区)

◆NCC-URM(日本기독교교회협의회議会都市農村宣教)委員会

◆NGO神戸外国人救援네트워크

◆阪神大震災地元NGO救援連絡会議

◆兵庫県 푸레온가스회수처리추진위원회

◆神戸NGO協議会

◆関西NGO協議会

◆関西国際交流団体協議会

◆地球環境NGO네트워크関西

◆外登法問題と取り組む 全国 기독교教連絡協議会 

   
▲야스다 교수
ⓒ 장익성 /에큐메니안
그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히다 유이치 관장과 고베대학 교수였던 야스타 교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0.5% 밖에 안되는 그리스도인의 일부이지만, 일본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으며,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가이의 본거지인 고배를 오히려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작지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이와 국경을 초월하여 우리의 믿음의 형제된 그리스도인들을 우리 기독교 청년학생들이 고베에서 만나고 토론하고 교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백만불짜리 야경의 도시이자 야마구치 가이의 본거지인 고베는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는 일본에서도 가장 치안이 안정된 도시입니다. 그리고 고베 지진이 발생했을 때, 동경대지진의 한국인에 대한 테러 공포를 부채질했던 한국의 보수 언론과는 달리 가장 협동적이고 우호적이며 질서정연하게 지진의 피해를 극복한 곳입니다.

모든 도로와 철도가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매점매석과 사재기는 물론 가격 폭등이 없었던 것을 보고 두려울 정도로 질서정연한 일본인라고 칭찬 반, 두려움 반으로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보도를 했지만, 일본의 양심인 아사히 신문이 ‘고베에는 고베 생협이 있었다‘라고 보도 했듯이, 그 원동력은 일본 최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인 고베 생활협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고베에 사는 가정의 70%가 ’사랑과 협동‘이 그 이념인 고배 생협의 조합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고베 생협을 만든 분은 일본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일본 빈민 운동의 아버지이자, 일본 생협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분입니다만, 그분은 일제 시대와 전후 일본 양심의 상징이었습니다.

심지어 동경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구호 활동의 중심에도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있었다고 NHK가 동경대지진 다큐멘터리에 소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생협 운동과 빈민 운동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금주 운동을 펼치면서 백만인 구령운동을 이끈 열정적인 전도자였으면서도, 일본 사회당의 창당 발기인이면서도 일체의 당직을 거부하고 정계는 발을 들여 놓치 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농민 운동, 노동 운동, 교육 운동, 평화 운동 등 일본 사회의 그늘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일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자기가 관여한 곳이 자리를 잡으면 머무르거나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언제나 떠날 줄 알았던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을 기념하는 제자들과 후학들이 세운 기념관이 일본에 6개나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여러 국제 기구에서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천거 했지만, 스스로 전쟁을 일으킨 침략국의 백성으로서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고 사양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국적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선배인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발자취를 만나러 고베 생협 기념관을 갑니다. 그리고 그 기념과 정문에 새겨진 ‘사랑과 협동’, ‘사람과 꿈’이라는 현판을 보며 제가 생협 운동의 꿈을 품고 지금까지 지내왔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꿈과 사명을 안고 이 땅으로 돌아 올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관계된 간단한 일화를 인터넷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고베의 일정 소개를 마치려고 합니다.  

1888년 일본 고베의 작은 마을에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5살 때 어머니마저 잃어 본처 자녀들과 한 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구박을 받고 학대를 당했는지 그는 살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 틈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늘 형제들로부터 ‘너는 기생의 아들이지!’ 하는 조롱과 비웃음이 따라왔습니다. 죽으려고 몇 번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고 생각이 부정적이 되면서 점점 소외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규칙적으로 불교의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 가문에서는 그를 절간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는 그 집에서 불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교훈을 철저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가 열두 살 되던 해 어느 날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다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어 토해보니 붉은 핏덩이였습니다. 검사를 해보니 폐결핵 3기였습니다.

 

그 후 그는 10대 후반인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도 맥없이 마루턱에 앉아 있는데 어디서 북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성탄절 날 구세군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이 때 그는 성탄절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즉시 그 대열에 따라 나섰고 전도 대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엔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그는 폐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각혈하게 되었고, 그는 사선을 몇 차례나 넘는 극렬한 투병 속에서도 그는 성경이 손에서 떨어진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운명 내 인생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자’ 하고, 1909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굴 거리는 빈민굴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엔 1) 병든 걸인 2) 폐결핵 환자 3)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과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입고 있었던 옷가지마저 그들에게 벗어주며 간절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청소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당시 25만부)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다음해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는 일본 고오베 신학교에 들어갔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몇 개월도 살기 힘들다던 폐병 말기의 환자, 그는 그 뒤로도 수 십년을 더 살아 70을 훌쩍 넘겼고, 그의 삶은 일본을 넘어 중국과 한국의 상처 난 사람들에게까지 촉촉하게 젖어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엄청난 저술을 했는데, 그가 저술했거나 번역한 서적은 자그마치 150권이 넘었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일본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이것이 그의 신조입니다. 그가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목사님입니다.

고상균  greatks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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