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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피랍]카라바그의 저주성공 위해 선교 활용한 한국교회가 야기한 고통
김진호 | 승인 2007.08.02 00:00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루가복음」 10장 36절)
 
지난 19일,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서 175킬로 떨어진 카라바그의 한 고속도로에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 무장 게릴라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아프간에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에 속하는 남동부의 칸다하르로 이동하던 중이었고, 그곳에서 힐라 병원과 은혜샘유치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23일 귀국할 예정이었습니다.

아프간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분쟁지역의 하나임에도 이런 대규모 납치 사건은 유례가 없는 것이어서 전 세계의 귀와 눈은 이 사건에 집중하였습니다. 세계의 유력 매체들로부터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안타까운 가슴을 조이며 지난 한 주를 보내야 했습니다.

피랍된 이들 중 두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의 생사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들이 과연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지, 혹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는 않을지,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상황이 너무나 답답할 뿐입니다. 한데 요 며칠간 일련의 이야기들이 우리를 더욱 아프게 합니다. 일부 네티즌들의 이른바 악플이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면서, 심지어 피랍된 이들의 미니홈피 등에 들어와서 폭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선일씨가 피살됐을 때 한국인이 코란을 태우는 사진을 누군가 알자지라 방송 홈페이지에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런 안티기독교 현상이 이제까지의 기독교의 무례한 행보에 대한 반작용임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기독교의 이러한 몰지각한 횡포를 비판하고 성찰을 촉구해온 대표적인 매체의 하나인 <뉴스앤조이>에는 이런 안티기독교적 현상을 성찰의 계기로 삼자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한국의 유명 기독교 지도자 7명이 한국교회의 이제까지의 선교 관행을 반성하고 선교의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성명을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외신도 지적한 한국의 선교 과열과 공격적 선교

이제 이 사건의 중요한 화두로 한국교회의 선교 문제가 도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미 세계의 유력 매체들인 <더 타임>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산케이신문> <BBC> 등에서 한국의 선교 과열을 지적하고 분석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미디어들도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데 여기서 사실관계에 관해 지적해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이번에 피랍된 이들은, 알려져 있듯이, 분당샘물교회가 주도한 한민족복지재단을 통한 선교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당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대단은 한국기독교의 선교관행에 대한 일정한 자기반성을 추동하는 새로운 세력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 열풍이 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해외 선교사 수에 있어서 1988년에 한국은 1천여 명으로 세계 55위였지만, 1990년대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여, 2004년에는 1만4천여 명으로 세계 2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최근의 해외선교를 이끈 기구들은 예외 없이 이른바 ‘공격적 선교’라고 하는, 피선교지의 문화와 사회, 정치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주의적 선교를 수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일방주의적 선교의 주요 대상은 이슬람권, 공산권, 그리고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프랑스어권의 가난한 나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방주의가 민족적 우월주의와 결합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하여 이러한 선교가 피선교지에서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키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지난 2004년 한국의 기독교도 3천여 명이 평화행진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나, 크렘린 궁 앞에서 대규모의 ‘모스크바 부흥집회’를 열려다 실패한 것 등은 잘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에 속합니다.

내가 정당하다고 그들도 원할까?

이러한 일방주의적 선교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최근 다양하게 모색되고 있고, 그것은 포교보다는 봉사와 인적・물적 지원에 초점을 두는 형식으로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당샘물교회와 한민족평화재단이 이러한 반성적 선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방주의적 선교단체에 소속된 일원이던 김선일씨 죽임에 선교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이번 피랍된 이들에게 선교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동일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번 피랍된 이들은 일방주의적 선교의 사도들은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점에서 분당샘물교회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는 교회로서 주목받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열풍이 그 일방주의를 지양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저는 여전히 낙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오마이뉴스>에 실린 한 평화운동가의 글 <내가 정당하다고 해서 그들도 원할까?>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글의 제목에서 이미 그 논점의 핵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인도주의적 봉사’라고 해서 현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님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일방주의에서 봉사 중심의 선교로 전환하였다고 해도, 여전히 일방주의적 봉사에 그치는 것일 수 있음을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신랄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매우 정확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선교적 전환이 피선교지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결부되지 않은 채 선교수행자들의 관점의 전환만을 과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나치게 활성화된 ‘단기선교’입니다. 이번 피랍된 분당샘물교회의 선교팀도 10일짜리 단기 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단기선교팀을 무수히 조직하여 해외선교지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내진 곳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들입니다. 어느 지역보다도 위험하기에, 잘 준비된 훈련과 섬세한 경험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안전도 지킬 수 있고, 다른 평화활동가에게도 위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곳입니다. 더욱이 자칫하면 현지인에 대한 세계의 이미지를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곳에 순수한 열정 외에는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이들이 보내어진 것입니다.

한국 교회지도자들의새로운 성장 아이템이 되버린 '해외선교' 

왜 그럴까요? 왜 한국교회들은 이러한 단기선교팀을 가장 위험한 지역에로 파견하고 있을까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수키 킴이라는 분의 글이 이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며칠 전에 저는 한 일간지 기자와 동일한 인터뷰를 한 바 있고, 그 어간에 다른 일간지 기자와 보다 길게 이야기를 하였지요. 그것은 한국교회가 내적인 동력이 고갈되자 외부로 눈을 돌려 위기를 돌파하려는 현상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해외선교를 선도한 대형교회들과 선교회들은 대외적 위상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교계에서의 영향력도 향상됐으며, 이는 보다 젊은 층을 끌어들이는 데 주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해외선교 기구를 이끄는 성직자는 한국기독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고, 또 해외선교 현장을 이끈 성직자는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즉 해외선교는 한국교회들과 성직자들의 새로운 성장전략의 핵심 아이템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기선교는 인생의 커다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도 하느님의 사역에 동참했다는 ‘사도적 자긍심’을 갖게 해 주는 꽤 괜찮은 선교 아이템이 됩니다. 물론 삶의 짜투리로라도 헌신하겠다는 태도는 소중합니다. 허나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너무 많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한 곳으로 그들이 보내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놀이기구 같은 것으로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즉, 위험한 곳일수록 참여한 이들의 만족감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람들에게 단기적으로 더 많은 사도적 자긍심을 제공해주는 어드벤처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와 선교회는 대외적 위상과 내대적 충성심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기성공을 위한 선교의 비극 '카라바그의 저주' 

여기서 우리는 단기선교 과잉의 한국 해외선교의 붐은 피선교지의 문화, 사회,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한국기독교 내적인 요소에 거의 압도적으로 영향 받은 전략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일방주의적 선교를 지양하겠다고 자임한 분당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재단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이 대안으로 시도하는 봉사와 후원 중심의 선교도 피선교지의 현장보다는 선교수행자 자신들의 자기만족의 메커니즘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선교의 관한 한, 기독교의 ‘원조명품’인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선교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 사람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정이나 신념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성이 아니라, 그러한 자기 자신을 죽이고 타인처럼 되는 것이었다는 얘깁니다. 선교는 내적 동기에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적 동기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카라바그의 저주’는 자기를 죽이려 노력하지 않는, 자기의 성공을 위해 선교를 활용하고자 했던 한국교회가 야기한 고통이요 재난인 것입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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