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당치도 않습니다!

인천공항에 미리와 대기하고 있던 고려민항 JS616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떠나기 이틀 전까지 출발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기내에 들어서자 이제는 우리 민족 모두의 애창곡이 돼버린, ‘반갑습니다’가 연주되고 있었다. 좌석에 깊이 몸을 묻히자 깊은 한숨이 절로 새 나왔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남북왕래란 가깝고도 먼 길이라는 실감이 새삼스러웠다.

그동안 이북 방문 기회가 몇 차례 주어졌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양보해야 했다. 금년 역시 처음에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통일인사 평양문화유적방문단’ 단장 한상렬 목사님의 적극 권유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목사님은 주저하는 내게 통일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다녀와야 한다며 잡아끌다시피 강권하셨다. 결과적으로 너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신 한 목사님께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고려민항기는 직행로를 비행할 수 없기에 서해로 우회해 한 시간 만에 우리를 평양 순안공항에 무사히 내려주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며 한 눈 가득 차오는 평양의 하늘, 서럽도록 푸르른 가을하늘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소박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순안공항, 마치 우리네 작은 시외버스 터미널 느낌이었다. 다르되 결코 낯설지 않은 평양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통일인사 평양문화유적방문단’은 평양문화유적 방문과 아리랑공연 관람이 주 목적이었지만 특별히 장기수 선생님 30여명이 동행해 처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거기다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과 맥아더동상 철거 등 미묘한 정세가 맞물려 방문 내내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행사 집행부는 물론 장기수 선생님들도 더욱 신중에 신중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과잉행동이 불거지면 향후 남북교류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경고는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누구보다 감회가 남다를 장기수 선생님들의 혼신을 다한 절제로 큰 탈 없이 방문을 마치게 됐다.

방문은 4박5일로 주로 평양일대와 묘향산을 다녀왔다. 이틀은 평양에서 나머지 이틀은 묘향산에서 보냈다. 평양 도착 첫 날 저녁에는 그 유명한 ‘아리랑공연’을 관람했다. 능라도 ‘5-1경기장’은 우선 15만 명을 수용한다는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아리랑 공연을 막상 눈으로 보면서 그 거대한 규모와 치밀한 연출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맞은편 관람석은 변화무쌍한 카드섹션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고, 아래 운동장에서는 수만 명이 참여하는 일사불란한 집단 안무가 펼쳐졌다. 8만여 명이 두 시간 남짓 고난을 뚫고 희망세상, 강성대국으로 전진한다는 조선로동당 60년사를,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아리랑 가락에 맞춰 형상화하고 있었다.

남녘 언론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쳤다 말았다’로 시비가 붙은 모양이지만, 막상 눈으로 보면 내용의 동의여부를 떠나 그 거대한 규모와 치밀한 연출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과는 또 다른 ‘쨍’하는 싸늘한 공기하며 이미 초록이 지쳐 단풍 가득한 그곳, 가을속 묘향산은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였다. 특별히 우리 명산사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묘향산 보현사에서는 뜻 깊은 집회가 열렸다. 동행한 각 종단(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성직자들이 함께 통일을 기원하는 ‘법회’를 드렸다. 원불교 교무의 사회, 수녀의 기도, 목사의 설교, 불자의 독경이 어우러져 비록 종교는 다를지언정 통일을 향한 염원은 하나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칠골교회 예배. 헌금찬양을 부르는 성가대원들.

10월 30일은 주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당연히 봉수교회를 기대했는데 마침 공사 중이라 아쉬움을 품고 칠골교회로 향했다.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 기념교회인 칠골교회는 우리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아담한 교회였다.

봉수교회 장승복 목사가 ‘평화를 위해 일하자’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하지만 설교보다 중년의 나이로 짐작되는 성가대 찬양이 훨씬 은혜스러웠다. 요사이 이북교회가 가짜교회니 뭐니 하며 시끄럽지만 기도와 찬양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모인 모든 무리의 가슴을 뜨겁게 변화시키리라 확신한다.

방문 기간 우리와 동행하며 친해진 안내원 리영민 선생이 지나듯 한마디 한 얘기가 가슴에 남았다. “선생님, 우리는 인민들 먹여 살리는 데도 허리가 휩니다. 전쟁, 당치도 않습니다. 도무지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리 선생의 표정에서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순안공항에서 평양시내로 이어진 도로변에 자리 잡은 산등성은 나무 한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이었다. 아리랑공연으로 이북 인민의 자긍심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평양의 밤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시원하게 뚫린 4차선 고속도로, 2시간 이상을 달렸지만 차량이라고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 했다. 안내원 말마따나 ‘고난의 행군’을 마쳤지만 ‘인민’의 형편은 아직 가파르기만 했다. 입만 열면 ‘북의 전쟁위협’을 들먹이며 성조기를 휘두르는 시청 앞 광장의 ‘인민’들이여, ‘와 보라’(요 1:39).



▲'민족식당' 의례원들과.

4박5일은 순식간에 지나고 다시 떠나야 할 시간, 숙소로 묵었던 양각도호텔 안내원들이 모두 나와 눈물로 환송한다. ‘도대체 저 이들의 심장은 어찌 저리 뜨거울 수 있을까?’ 길에서 마주친 ‘인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들뜬 듯한 특유의 억양에 담아 “통일합시다!” 내미는 손길에 열정이 가득하다.

평양을 다녀온 지 한달이 다 되건만 아직도 민족식당의 아리따운 누이들 모습이 손에 잡힐 듯 하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의 안쓰러울 정도로 깜직한 아이들, 떠나보내는 게 아쉬워 우리 일행이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던 대동강 유람선 안내원들, 모두 다 그립기만 한 우리 형제자매 아닌가! 조금만 참자, 조금만 기다리자, 반드시 통일의 그날 이뤄 밤새 밀린 얘기 나누며 오늘의 아쉬움을 마음껏 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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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의 소식지 101호에 실렸습니다!

진광수 leben6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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