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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에 대한 기도는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는 것주기도 탐구3: 일용할 양식
김진호 | 승인 2006.01.10 00:00

주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의 주제가 하느님이라면, 후반부의 주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통합하는 주제는 하느님 나라다.

빵에 관한 기도는 추상적인 진리가 구체적인 땅의 모습을 입는 것

지난 두 번에 걸쳐 우리는 주기도 전반부의 하늘과 땅의 대립이 하느님 나라가 인간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유예되고 있는 현실과 관계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늘’에선 그 나라가 실현되어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즉 그들에게 하늘이란 ‘지금 여기’에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질곡과 정확하게 반대편에 있다.

   
주기도문의 빵에 대한 기도는 추상적인 진리가 구체적인 땅의 모습을 입는 것이다.
요컨대 ‘하늘’이란 하느님 나라의 추상적 지평으로, 현실의 질곡 속에 눌려 있는 이들이 표상할 수 있는 염원의 극대치를 나타내는 기호다. 그런데 이런 진리의 추상성을 나타내는 기호가 현실과 접점을 맺는 부분은 어디인가? 주기도의 두 번째 부분은 바로 그것에 관한 해명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주기도 전반부의 마지막 구절에서 기도자는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이라고 기원한다. 그러므로 후반부는 자연히 추상적 진리의 현실화, 즉 기도자의 실존적 바람을 경유한 하느님 나라의 현실적 지평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구절이 바로 일용할 양식에 관한 간구다.

예수 시대와 초대 교회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고통은 배고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주소서.” 이 구절은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에 관한 공감(common sense)을 보여준다. 배고픔은 예수 시대 대중의 가장 일반적인 고통이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공감’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그런 점에서 예수와 동일한 공감을 갖고 그의 기도를 떠올린다(반면 오늘 우리 사회의 대다수는 고통에 관해 다른 공감을 갖고 있지 않은가). 대중의 굶주림은 예수와 이 두 복음서 공동체의 주위에 널려있었고,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사람들의 고통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복음서는 예수의 말을 두 가지 점에서 조금 다르게 기억한다. 하나는 ‘주다’는 뜻의 동사 ‘디도미’(διδωμι)가 「마태오」에서는 과거 명령형 동사 ‘도스’(δος)로 쓰인 반면, 「루가」는 현재형(‘디두’, διδου)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을 뜻하는 부사 ‘세메론’(σημερον; 「마태오」)과 ‘날마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토-캇-헤메란’(το καθ´ `ημεραν; 「루가」)의 차이다.

빵은 루가에 은총의 계속됨을, 마태에게는 지금의 생존을 이어가는 은총

즉 「루가」는 하느님이 ‘빵’을 주는 행위를 그야말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마태오」는 받는 그 시점을 강조한다. 「루가」가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마태오」에선 ‘지금 당장’이라는 시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는 두 텍스트가 서 있는 시공간적 맥락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우선 「마태오」에는 내일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의 간구가 들어 있다. 이들에겐 현재의 시간은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처럼 오늘도 그러하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에겐 시간은 지속되지만, 그 흐름은 질적인 차이를 담고 있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의 실존의 시간은 중단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래서 「마태오」의 기도 속에는 강렬한 ‘종말론적 기대’가 저변에 깔려 있다.

반면 「루가」는 종말의 지연을 허용할 여유가 있다. 왜냐하면 시간의 흐름을 성찰하면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또 내일이 다를 것이기에, 그 ‘다름’ 가운데에서 불안정한 실존의 위협이 온다 하더라도 ‘일용할 빵’이 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신앙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공동체의 빵에 대한 절박함은 일상의 폭력 속에 살아남기 위한 수단

여기서 우리는 두 텍스트가 각각 어떤 문맥 속에 위치하는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마태오」는 산으로 올라간 예수 일행에게로 모여든 군중을 향해 이 대안적 기도를 가르쳐주고 있다(주기도는 「마태오」에선 이른바 ‘산상설교’의 문맥 속에 위치한다). 반면 「루가」는 예수가 모처에서 기도하면서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예수 당시로 환산해서 읽어봄으로써, 그 의미의 가능성을 상상해보자.

   
마태에게 공동체의 절박함은 생존이었지만, 루가에게 절박함은 공동체의 유지와 평등한 분배에 있었다.
우선 「마태오」에서 ‘산’으로 예수를 찾아 따라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복음서는 예수가 마을 회당에서 활동할 때 촌락의 백성들이 그이의 청중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충돌하고 난 뒤, 예수 일행은 더 이상 회당에서 활동할 수 없었고, 대신 바닷가나 산등성이 등, 비경작 지역이 집회 장소로 쓰였다.

이때 예수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은 내일의 생계를 예상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지금 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다면 죽어도 좋다고 할 만큼, 아주 절박한 지경에 있던 자들이었다. 「마르코」의 표현대로 하면 그들은 ‘오클로스’다(「마태오」와 「루가」에는 오클로스의 이러한 계층적 지시성이 훨씬 모호해진다). 만약 「마태오」의 공동체가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면, 이 기도문은 그 자체로 절절한 자신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마태오」의 지리적 배경이 유대 전쟁 직후의 시리아 남부-팔레스틴 북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후의 폐허와 패전국 백성에 대한 주위 나라들의 테러리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재로 「마태오복음」에는 어느 텍스트보다 폭력적 묘사들이 넘실거린다. 그만큼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이 복음서는 탄생한 것이다. 전쟁의 테러리즘을 기억 속에서나 간직하고 있던 예수와 그것이 현실 자체인 「마태오」의 기도는 같은 굶주림을 말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폭력의 뉘앙스가 깔려 있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은 떠돌이 예언자 집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곳에서 박대를 받았다. 게다가 헤로데의 공권력의 추격을 피해 다녀야 하는데, 마을 유지인 바리사이가 제보자로 나선다면, 헤로데 당국을 피해 다니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 공권력에 활동이 노출된다면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도망쳐야 할 터였다. 그런 이들에게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가? 내일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루가에게 빵은 교회공동체의 유지와 평등한 나눔에

그러나 「루가」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이미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반 제자들과는 다른 제자, 즉 ‘사도’로서 공동체에게 음식을 배급해주는 주체였다.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주는 존재,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용할 음식의 배급이란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였다. 「루가」의 텍스트가 이와 같이 제자들의 사회적 위치 변화를 담고 있는 한, 여기서의 이 구절은 ‘굶주림’을 대하는 예수와 동일하지 않은 시선이 전제되고 있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필경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는 일용할 빵에 관한 종말론적 간구를 포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만큼 끼니의 문제는 절박한 것이었다. 유대교의 18개조 기도문의 제9항, “올해도 우리를 축복하여 주소서. 오 주 우리의 하느님이시여. 그리고 당신의 보고(寶庫)에 있는 재물로써 이 세상을 만족하게 하여 주소서.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해마다 축복하시는 분이시여!”와 비교해보라.

후자는 곡식이 가득 쌓인 창고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축복이 나누어질까를 고민하지만, 전자는 곡식 창고라는 말 자체가 실존과는 너무 먼 곳에 있다. 마치 어떤 민생 정책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실현되었다고 기도하는 사람과, 그런 민생 정책에도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채 기도하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물론 「루가」의 기도자도, 유대교의 이 기도 항목처럼 분배를 걱정하면서 기도하지만, 그는 신의 편보다는 인간 편에서, 통치자의 편보다는 백성의 편에서 간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루가」의 기도는 유대교의 기억의 계열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와 계열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빵에 대한 우리의 기도는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는 것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이 기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절대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극빈층 외에는 이런 유의 기도에 공감할 수 있는 이가 도대체 있을까?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 방법을 생각하곤 하는 우리, 영향 결핍보다 영향 과잉을 우려하는 우리가 이 기도를 공유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 빵에 대한 기도는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고 동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우리에게 「마태오」와 「루가」가 전해준 주의 기도는 하나의 독해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특히 ‘빵’이 당장의 끼니를 뜻할 뿐 아니라, 중의적으로 ‘절박하게 요청되는 실존의 양식’이라는 관점으로도 읽혀질 수 있다면, 「루가」처럼 날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실존적인 고통을 간구하는 기도로서 재독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처럼 실존의 고통이 소거된 기도가 아니라, 고통 외부에서 그 위에 선 자로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고통, 나아가 타인의 고통을 스스로에게 전이시켜 기도 속에 담아내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에게 일용한 빵을 (날마다) 주소서”라는 예수의 말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언어로 번안되어야 하며, 또 수없이 많은 언어로 다르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르게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나아가 이웃의 고통을 담아내는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서의 ‘주의 기도’를 다르게 읽는 것만이 아니라 ‘다르게 쓰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다르게 읽고 쓴다는 것은 고통을 활용하는 사회의 메커니즘을 들춰내는 작업을 수반한다. 바로 그러할 때, 그런 삶을 담아내는 기도에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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