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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단상(斷想)‘촛불’에서 나타난 종교계 비폭력 이념과 저항권
고상균 기자 | 승인 2008.07.25 12:49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지날달 말 원천봉쇄로 막혔던 서울 시청광장에서 ‘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교만한 대통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시국회의와 미사’를 5만여 신도와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었으며, 평화롭게 촛불행진을 벌였다.  ㅣ 이철우

지난 두 달여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깨우고 세계를 놀라게 한 촛불집회가 그 규모와 여론 주목도는 다소 소침해졌을망정 아직도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전체 집회를 조직하는 주관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집단도 없는 ‘군중’이 방송매체를 만들고 사회자를 세우며 운동방향을 설정하고, 심지어 출출하고 한기 느껴지는 새벽엔 따뜻한 차와 든든한 주먹밥을 넉넉히 모아내는, 그야말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집단 지성의 자가 성장을 목도하였다.

단세포 개그로 일관한 공권력

이와 같은 금세기 유래가 없는 시민운동에 공권력은 촛불을 사서 나누어주는 배후를 밝히라는 둥, 집에까지 가서 검거하겠다는 둥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단세포 개그로 일관했고, 급기야 늦게나마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조롱 대상이 되었음을 알아챈 그들은 조중동의 든든한 색깔론 십자포와 그들 손에 쥐어진 강력한 물리력을 십분 이용하여 십대 청소년에서 유모차를 끌고 있는 부녀자에게 이르기까지 무차별폭력을 가했고, 소위 주모자 색출이라는 군사 독재 정권의 유행어를 부활시켜 복고풍 정국을 연출하였으며, 인터넷과 언론 장악을 통해 바야흐로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로마제국의 평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아울러 그동안 해방과 축제의 장이었던 시청 앞 광장은 한국 경찰이 지닌 신적 버스주차능력-그야말로 쌀 한 톨 통과할 수 없을 만큼의 밀착 주차 능력-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홍보관으로 전락하였고, 현직 대통령이 시장 재임 시절 서울 시민에게 성은(?)을 내려 서울 중심부의 보행권을 하사했다고 그토록 자랑했던 너른 보행로를 지나가겠다는 시민은 순식간에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빨갱이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필경 촛불정국 경색을 가져왔고 모두가 피부로 느끼는 최근의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보수, 진보를 포괄하여 참으로 다양한 진영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방법론으로 촛불을 해석하려 하고 있으며, 많은 운동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글쓴이의 관심은 이 중 종교진영이 가지고 있는 인식에 대한 것이다. 촛불에 대한 강경 진압을 실행에 옮기고 시청이 봉쇄된 직후,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을 시작으로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한국의 주요 종단들이 촛불 지킴이를 자처하며 시민들의 앞에 섰다. 때로는 시국미사로, 혹은 기도회로, 어떤 경우에는 법회와 108배 등, 각 종교가 지닌 다양한 모습으로 광장을 꾸민 이 행렬은 강경진압이라는 외풍에 자칫 꺼질 위기에 처했던 촛불을 재점화시킨 긍정성을 지닌다고 하겠는데, 이러한 종교운동이 지닌 외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내적 통일성은 아마도‘비폭력’이라는 이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진다.

‘비폭력’과 ‘저항권’.. 모든 물리력(폭력)은 악인가?

‘비폭력’...... 이는 비단 종교계 뿐 아니라 촛불 기간 중 적극 참여한 다수 시민의 공유된 인식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특히 앞서 언급한 ‘종교인의 일주일’에 더욱 강하게 전면에 드러났다. 경찰의 과잉진압에서 촛불대오를 보호하고 자칫 공권력의 충격 앞에 흩어질 위험이 있는 민심을 통일해 내는 방안으로서 비폭력은 적어도 당시에 상당한 가치를 지닌 운동이념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폭력 이념은 많은 부분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먼저, 비폭력 이념이 지닌 폭력에 대한 개념이다. 많은 부분 종교계가 천명하는 비폭력의 이유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폭력은 악이기 때문이며, 저들-경찰-과 같이 폭력을 행한다면 우리도 역시 동일한 악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겠으며, 해당과 같은 논리에 근거해 종교계 운동 진영은 타이어에 바람을 빼고 버스 철창을 망치 등으로 내려친 시민들의 행위를 잘못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논리가 지닌 첫 번째 문제는 공권력의 물리력과 시민의 저항적 물리력을 모두 같은 ‘폭력’으로 규정한다는데 있다. 십 수 년 전 건장한 남성 3명에 의해 잔인하게 강간을 당한 한 여인이 그들과 함께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이유는 당시 상황 속에서 그 여성이 저항하다 남성 한 명의 혀끝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물리력으로 항거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행해진 여성의 저항,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쌍방과실’즉, 강간도 폭력이나 혀를 끊어낸 것도 그에 상응하는 폭력이라는 평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공정한(?) 판결’에서 삭제된 것은 절대 약자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저항권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는 그 여인에게 씻을 수 없는 2차 폭력을 가하게 된다. 다시 촛불로 돌아와서 시민의 정당한 집회 결사의 권리가 묵살당하는 상황, 더더욱 그에 대한 원천봉쇄라는 비인권, 몰헌법적 조처 앞에서 행해진 시민의 타이어 펑크와 망치질은 그저 당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여인이 행한 물어뜯기와 큰 틀에서 일맥상통한다. 누가 그들을 폭도라 할 수 있는가? 만약 종교계가 계속해서 정당한 저항권을 폭력으로 비판한다면 그 진위와 무관하게 촛불의 의미를 왜곡하려는 조중동의 파렴치한 논리와 동일선상에 서게 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더 이상 시민들은 종교진영의 자칭 촛불 지킴이 역할을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 경찰은 제헌절 60주년을 맞은 7월17일, 시청광장을 전경버스로 가로 막으며, 집회시위 자유를 원천봉쇄했다. ㅣ 이철우

종교계 비폭력, ‘촛불을 잠재우다?’

종교계의 폭력 개념으로 인해 도출되는 두 번째 문제는 자신들이 규정한 악의 시궁창에 본인들의 발을 담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찰과 서울시가‘불법점거(?)’중인 광장 내 천막들을 철거하기에 앞서 언제까지라도 단식투쟁을 계속할 것 같았던 정의구현사제단은 돌연 단식을 종료하고 천막을 정리한다.

물론 현실적인 상황인식과 더 바람직한 운동 방향에 대한 고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사제단의 철수는 상호간 격한 대립 즉 상호간 물리적 충돌이 임박한 상황에서 평소의 일관된 비폭력 기조의 반영이라 할 수 있겠으며 이로 인해 함께하던 많은 시민단체들은 거침없는 철거 공격 앞에 아무런 보호막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공권력은 철거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자진 철거 시한을 명시하며 철거 순간에 한시적 저항을 계속했고, 이후 정부의 폭력 철거에 대한 항의활동을 벌인 개신교의 촛불교회는 이에 비해 보다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자진 철거 결의라는 측면에서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제단의 단식 농성 천막으로 대표되는 종교계가 당시 끝까지 자리를 지켰거나, 더 적극적인 저항을 벌여나갔다면 비록 폭압적 철거공격을 무력화 시킬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 활동의 폭을 좁힐 수 있었을 것이며, 최소한 그 자리에 함께한 시민들에게 함께하는 종교라는 큰 의미와 용기를 심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은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한 종교인의 일주일이 촛불을 살렸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한 기운으로 피어오를 시기에 이를 잠재워 벼렸다는 최근 일각의 비판적 평가는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조악한 글로 최선을 다해 자리에 임하신 분들의 의미를 희석시킬 뜻은 전혀 없다. 오히려 글쓴이는 많은 부분 비평의 입장이기보다는 반성의 자리에 서야 할 부분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들이 일상으로 사용하는 단어와 이념이 실은 그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을 배제하는 폭력의 언어가 될 수 있음과 종교인의 사회참여에 있어 구체적인 운동방식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에 서술의 의미가 있다.

공권력과 조중동이 ‘촛불을 접고 이제는 사회 안정’이라는 말을 쓸 때 그들의 사회에 우리가 없듯, 자칫 우리가 비폭력이라는 이념적 기조에 경도되는 순간 가장 약자가 지닌 최후 저항권의 팔꿈치를 꺾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서 이야기 속에서 함께한 민중을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평화로운 예수와 채찍을 들어 상인을 내친 폭력적인 예수는 우리의 신앙 고백 속에서 분명 한 분이며, 외형상 상이해 보이는 예수의 두 행위는 물리력 자체의 선악 문제가 아닌 낮은 이를 향한 사랑이라는 메타이념에서 합치된다.

* 고상균 기자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입니다.

고상균 기자  greatks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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