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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한인 부부의 소박한 삶, 감동의 사업 스토리남인도 코나이카날 농장 사업가 전승언 ·박순희 씨
김철관 기자 | 승인 2008.07.31 18:34
   
▲ 코다이카날 농장사업가 전승언 박순희씨 부부가 인터뷰를 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l 김철관

“남인도 고산지대인 코다이카날에서 환경 친화적 사업을 펼치고 있어요.


해발 2000미터에 위치한 고산지대인 인도 남부 타밀나두 코다이카날(South India Tamil Nadu Kodaikanal)에서 유기농커피와 배추, 무, 파, 부추, 미나리 등 한국채소를 생산·유통에 성공해 이곳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불리고 있는 ‘락스 밸리(Rocks Valley, 바위와 골짜기) 농장’ 주인 전승언(66)·박순희(58)씨 부부. 이들이 겪은 감동의 사업 스토리가 눈길을 끈다.

이들 부부는 인도에서 20여 년을 넘게 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는 남인도 코다이카날 비엘 쉐드(BL SHED) 마을에 정착, 농장을 운영해 성공한 CEO로 유명세를 타고있다. 이곳 코다이카날 정치인, 경찰, 공무원 등 고위 관료들도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할 정도다.

10만평의 농장 부지에 6만평은 유기농 커피를, 나머지 4만평은 바나나, 잭 후르트, 아보카도, 오렌지, 자두, 라임 등 이곳 과일과 배추, 무, 상추, 감자, 미나리, 깻잎, 오이, 가지 등 한국 야채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특히 유기농 커피는 1년 10톤의 수확량을 자랑하고 있고, 인도 정부에 유기농 인증을 신청해놓고 있는 상태다. 유기농 커피는 한국 수출도 모색 중이다.

   
▲ 락스 밸리 농장에 열린 유기농 커피 열매 l 김철관

이들이 정착한 비엘 쉐드(BL SHED) 마을은 ‘노예들의 거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 마을은 과거 인도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평생 주인을 모시고 종(노예)으로 일하며 살았던 비참한 곳이기도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전승언·박순희씨 부부는 라지브 간디 전 수상이 델리, 뭄바이, 첸나이(당시 마드라스) 등을 인도수출자유지역 지정 선포 직후인 지난 85년 첸나이 수출 공단 내 봉제완구 공장을 지어 해외에 제품을 수출한 최초의 인도 진출기업인이었다.

이와 관련해 전승언 락스 밸리(Rocks Valley) 농장 대표의 말이 이어진다. “인도로 오기 전 한국에서 봉제완구를 만들어 팔았지요. 당시 한국은 봉제완구 사업이 사양사업이 됐어요. 소련에 수출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소련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라서 인도를 통해 소련에 진출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인도 진출을 꿈꿨지요. 처음 한국기업과 인도기업이 반반 투자하는 합자회사 형식으로 시작했고 한국 기업으로서는 인도 첸나이에 1호 공장을 짓게 됐습니다. 합자회사라는 의미로 상호도 ‘인도코리아 예술·공예 주식회사(India Korea Arts and Craft Ltd)'로 지었지요. 공장 오프닝 행사에 당시 김태지 인도 주재 한국대사까지와 축하를 해줬습니다. 공장 오픈을 한지 6개월 만에 획기적으로 제품을 생산해 미국, 독일, 이태리 등으로 수출을 했지요.”

   
▲ 전승언 락스 밸리 농장 대표는 봉제완구, 식당, 농장 등 사업을 20년을 넘게 인도 현지에서 진행해 성공한 CEO다. l 김철관

아내 박씨도 봉제완구 공장을 운영할 당시, 직원들과의 재미있는 일화를 전했다. “고등학교 이상 학력으로 신입사원 모집을 했는데 80%가 맨발로 왔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들을 안 받겠다고 하니까 면접을 먼저보고 간 사람의 신발(슬리퍼)을 빌려 돌려 가면서 신고 면접을 보러 왔어요. 가난이 근본 원인이지만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는 문화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할까요.”

박씨는 말을 계속 이었다. “채용 후에도 신발을 신지 않는 직원들이 많아 매일 정문에 서서 신발 신는 캠페인을 전개했어요. 공장 안이 청결해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신발을 신지 않는 종업원에게 슬리퍼를 사 준 것만 해도 한 트럭은 될 거예요. 또 머리에 이가 많아 이를 잡아 주느라 정신없었어요. 특히 완구는 마감 선을 손으로 꿰매야 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손에 묻힌 반찬 색깔이 제품을 꿰맨 일직선을 따라 묻었어요. ‘쌈바’라는 인도 반찬은 노란색이고 ‘라쌈’은 초록색인데, 인형 꿰맨 곳이 하루는 노란색으로, 다음 날은 초록색으로 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황당했지요. 제품의 퀄리티 컨트롤을 위해 인도 일꾼들의 손으로 식사하는 습관을 고치게 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300여명 직원들이 식사를 하면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수저를 쥐어주고 식사 후에는 물통을 들고 다니며 손을 비누로 닦으라고 호소하고 다녔어요.”

   
▲ 아내 박순희씨는 남편을 내조하면서도 강력한 사업의 조언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과거 봉제완구 공장에서 만든 인형을 들고 당시 일 l 김철관

하지만 이들은 함께 사업을 한 인도 투자자와 파트너십이 깨져 쫓겨나게 되는 등 우역곡절을 겪는다. 사업에 실패한 것이다. 전씨가 당시를 회고했다. “4년 만에 파트너십이 깨져 회사에서 나온 승용차와 아파트를 빼앗겼습니다. 이국땅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허탈감이 생겼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상의할 친구나 지인도 없고, 동이 트는지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어요. 3~4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기도 했고요. 부양할 다섯 식구 생계도 걱정이 됐고, 죽느냐 사느냐하는 기로에 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다보니 누구를 원망할 여유가 없었어요. 월세보증금도 없었을 정도이니까요.”

전씨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던 말을 이어갔다.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돈이 없어 첸나이 변두리로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지요. 당시 2000루피 정도 주고 월세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재봉틀 구입해 아내와 함께 인형을 만들어 시장에 나가팔았지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추운 날씨는 참아도 더운 날씨는 못 참은 체질 때문에 당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40도가 넘는 무더위 때문에 방바닥에 물을 뿌려 고이게 해 그곳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물속에서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면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요. 하지만 절대 사업의 꿈을 접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만든 인형이 잘 팔려 서 너명의 직원을 채용해 한푼 두푼 돈을 모았습니다. 4년 정도는 인도 봉제완구 기업에 기술전수 등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컨설팅 역할도 했고요.”

   
▲ 락스 밸리 농장 전경. 안개 때문에 농장안 배경이 희미하다. l 김철관

전씨는 “사업의 실패는 인도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면서 “인도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면서 사업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만나본 인도 사람들은 휴머니티가 있고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영어와 타밀어에 능통한 그는 “사업 비즈니스는 영어와 현지어에 능통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합니다. 너도 먹고 나도 먹자는 생각이 아니고 인도인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한마디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도인들과 조정이 안 될 정도이니까요. 서로 상생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인도인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옳지요. 너도 먹고 살고 나도 먹고산다는 상생이 중요한 가치가 돼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내 박씨가 다시 말문을 연다. 20년을 함께 데리고 동고동락한 현지 고용인 마노마니 얘기를 들려줬다. “몰래 음식을 훔쳐가 혼내면 집을 나갑니다. 남편이 항상 달래 데리고 들어오지요. 절대 빈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당시 월급 200루피로 다섯 식구가 연명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지요. 도둑질은 나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월급을 올려주고 싶어도 함께 일한 노동자와 형평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닭고기, 비누, 소금, 쌀 등 생필품을 사줬습니다. 그리고 한국 시댁에 데리고 와 1년간 한국생활을 체험하게 하기도 했고요. 20년 전 월급이 200루피(약 500원)였는데 이제 3000루피(약 8만원 정도) 정도 받아 갑니다.”

   
▲ 락스 밸리 농장 전경. 안개 때문에 농장안 배경이 희미하다. l 김철관

이들 부부가 본격적 사업 재기 발판은 90년 중반 현대자동차 공장이 첸나이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90년대 중반 현대자동차 첸나이 공장 건설을 현대 건설에서 맡았지요. 그 이후 현대자동차 공장이 완공돼 생산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 음식을 먹을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공장 건설 때부터 현대자동차 공장이 완공돼 자동차 생산을 하고 있는 한국 노동자들을 위해 한국식당을 운영했습니다. 당시 운영했던 한국관(코리아 하우스)은 현대 노동자들이 이용한 유일한 한국 식당이 됐습니다. 최초 인도로 진출한 한국식당으로 남게됐지요.”

최초 인도 진출 한국 식당 운영 뿐만 아니라 최초 한국기업을 운영한 기록을 남긴 셈이었다. 이들은 식당을 운영할 당시 첸나이에서 승용차로 약 10시간 거리에 있는 고산지대 ‘우띠(Ooty)’에 한국에서 직접 가지고 온 배추, 무, 상추 등 야채 씨를 ‘계약 재배’해 싱싱한 채소 반찬을 한국 노동자들에게 만들어줬다.

아내 박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당시 음식을 못해 맛이 없었지만 현대 사람들이 맛있다고 잘 먹었어요. 주방요리사로 일하랴 홀 서빙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채소 씨만 가지고 와 계약재배를 해 모든 한국 야채를 현지에서 조달한 것도 큰 보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미나리는 씨가 아니라 뿌리를 솜에 적셔 가지고 와 우띠 농장에서 심어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현재 코다이카날 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미나리도 그때 가지고와 전수된 야채이지요.”

   
▲ 자연생태 캠프를 위한 농장안 텐트를 살펴보고 있는 전 대표. l 김철관

전 대표는 식당을 운영해 번 돈으로 첸나이에서 12시간 거리에 있는 코다이카날 비엘 쉐드 농장 10만평을 샀다. 그리고 20여년의 첸나이 생활을 청산, 2004년부터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인도 경제가 부상하면 할수록 레저산업도 함께 성장할 것”이라면서 “자연친화적인 레저산업에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인도 경제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레저산업도 함께 성장합니다. 이곳 농장에 어린이나 어른들이 자주 찾는 친자연적인 종합레저 시설을 만들어 운영할 생각입니다. 행글라이더, 생태계 탐험, 자연생태 관찰, 폭포 관람, 트레킹, 명상, 요가 등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이용한 학습시설을 구상중입니다. 현재 자연 생태 캠프시설은 거의 완공돼 조만간 문을 열 계획입니다.”

해발 1600미터 위치에 숲으로 둘러싸인 농장 한곳에는 텐트와 식당, 샤워시설과 화장실이 구비된 자연 생태 캠프시설이 완벽하게 꾸며졌다. 배드민턴과 캠프파이어 장소 등의 시설 마무리 작업도 한창이었다.

   
▲ 농장 안에 있는 전씨 부부가 사는 집. l 김철관
   
▲ 과거 봉제완구공장 시절 등을 담은 사진을 펼쳐보였다. l 김철관

이곳 농장에서는 25명의 현지 노동자들이 고용돼 이들 부부와 함께 채소, 커피, 과일 등을 기르고, 따고, 파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 야채는 첸나이 한국 식당에 전량 판매되고, 커피와 과일들은 남인도 내에서 소비되고 있다. 특히 이들 부부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주변 마을에 땅을 사 건물을 지었고, 주민들에게 컴퓨터, 영어 등의 무료 교육을 준비 중이다.

22년 인도생활 중 방문을 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자상한 부부로도 소문이 나기도 했다. “첸나이나 지금 이곳 집에 다녀간 한국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고향소식을 전해 듣고 하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솔직히 일부 다녀간 사람들에게 섭섭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그들이 우리를 찾아 즐겁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한국 사람들이 찾아오면 있는 밥과 반찬 함께 나눠 먹으면서 더욱 재미있게 해줄 생각입니다. 부담 없이 찾아주세요.”

전씨는 “오랜 세월 인도에서 살다보니 한국 사람들은 인도인이라고 말하고, 인도인들은 한국인이라고 한다”면서 “얼굴로 봤을 때는 정체성이 모호할 때가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인도에 대한 글을 쓸 때 못살고, 지저분하고, 거지가 많고, 카스트제도, 힌두교 등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한 것이 문제다. 인도 철학, 고급문화, 지도층 등을 다 아우르는 다양한 식견의 글이 인도를 제대로 해석하게 될 것"이라면서 "시간이 나면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피력했다.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이들 부부도 생각이 다른 측면이 존재했다. 전씨는 고희(古稀)를 앞둔 나이임에도 인도에 남아 왕성한 사업을 펼쳐 한국인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겠다는 생각이고, 아내 박씨는 22년 동안 인도생활이 항상 이방인으로 느껴져, 한국에 건너가 연극, 영화 등을 보면서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의 차이를 드러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전씨는 자신의 건강비결을 생선회나 육회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아내 박씨는 구수한 입담으로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이 건강이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특히 이들부부는 이곳 마을에서 금슬이 좋은 부부로 소문났다.

   
▲ 트로트 가수 시절 전승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당시의 전승언 대표의 사진이다. l 김철관

남편 전씨는 80년 초 전승일이란 가명으로 트로트 가수로, 언론통폐합전까지 존재했던 동양방송(TBC)에서는 탤런트로 활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때 김철호 회장이 이끈 명성그룹 소속 명성전자에서 잘나간 직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명성전자 600% 제품 판매 달성 공로로 ‘무역의 날’시상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명성그룹이 도산해 실직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첸나이에서 초·중등교육을 받은 큰 아들 재형(37) 씨는 현재 LG전자 차장으로, 쌍둥이인 나용(35)·나진(35) 씨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김철관 기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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