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에큐메니칼소식 문화 채창완의 기독교미술
초과 실재와 선악과 사건
채창완 | 승인 2008.10.24 23:25

‘초과 실재’와 선악과 사건

우리는 흔히 미술을 추상미술과 구상미술로 나눈다. 그래서 대상의 묘사나 표현이 없는 작품을 ‘추상’이라 하고, 그 반대를 ‘구상’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인 분류일 뿐 실제로 현대미술은 이러한 구분을 지양한다. 바넷 뉴먼의 작품과 리차드 에스테스의 작품을 비교해보자. 일견에 형식적으로 전자를 ‘추상’으로 ‘후자’를 ‘구상’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대상의 표현에서 차이를 보일 뿐 포스트모던미술의 코드를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다. 이 말은 이 두 작품 모두 대상의 실제적 묘사를 떠나 있음으로  ‘초과 실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추상’이냐 ‘구상’이냐 하는 구분이 무의미하다.

바넷 뉴먼은 대상에 대한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리차드 에스테스는 대상에 대한 ‘초과 묘사’를 통해 각각 실재 대상과 결별한다. 자연적 대상과의 철저한 결별, 이것이 포스트모던 미술의 중요한 조형적 코드이기 때문이다. 두안 한스의 작품을 보자. 그의 실재 대상과 유사한 조각은 실재 사람보다 더욱 실재 같아 보인다.

실재 인간을 그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가 묘사한 조각품의 땀구멍과 체모 등은 실재 인간의 그것 보다 더 ‘사실적’이다. ‘실재 인간보다 더 사실적이다’라는 말은 이 작품이 지닌 아이러니이다. 그는 실재 인간 보다 더 실재 같은 인간을 조각품으로 표현함으로써 실재 인간이란 자연적 대상을 떠난다.

이로 인해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초과 실재’이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작품을 우리는 ‘하이퍼Hyper’라는 말을 사용하여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이라 부른다. 사전적으로 이 ‘ Hyper- ‘라는 말은 ‘건너편의; 초월; 과도히, 비상한’이란 의미를 갖는다. 결국 실재를 초월하거나 실재를 부정하는 모든 것이 실재를 사라지게 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미술이 지닌 하나의 패러독스이다. 실재를 사용하여 실재를 사라지게 하기. 과장되거나 초과된 사실은 실재를 은폐하거나 실재를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실재가 없는 예술 작품은 ‘거짓’이나 ‘허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실재’를 작품 속에 창조하는 것이다.

황규철의 작품은 이러한 ‘초과 실재’의 맥락에 서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작품의 제목에서 쉽게 이 작품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이란 제목은 창세기의 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가 표현한 ‘사과’가 정확히 ‘선악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창세기에는 이 과일나무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사과=선악과’라는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그리스 신화에서 온 것이리라. 대지의 신 ‘가이아’가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에게 선물로 준 나무가 바로 ‘황금사과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혹>이란 작품은 정확하게 창세기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정확히 재현할 수 없다면 우회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사실을 사실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초과 실재’를 사용함으로 또 다른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선악과 사건’을 현재에 정확히 재현해 낼 수 없다. 만약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사실’의 범위를 벗어난다. 누가 그것을 사실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초과 실재’는 우리에게 ‘거짓’이 아닌 또 다른 사실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하여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적 주제를 표현한 작업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여지는 있다.

성서적 내용을 작품에 표현하면서 현재의 실재 세계를 그대로 도입한다면 어색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선악과 사건’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도 그리고 현재 실재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현실 속에서 ‘초과 실재’의 형태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작품 속에서 검은 바탕에 사과 하나와 손 하나 만으로 실재를 초월한 ‘초과 실재’가 이루어졌다. ‘초과 묘사’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 작품은 평범한 실재 세계의 자연을 묘사한 차원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유혹>이란 작품을 통해 창세기의 한 사건을 우리 눈앞에 또 다른 실재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것’은 ‘초과 실재’와 접점을 이룬다.

채창완(기독교문화비평가)

 

 

 

 

 

 

 

 

채창완  artngod@cyworld.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채창완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