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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의 미국주의, 심성사적 배경(식민지시대)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2)
김진호 | 승인 2005.07.26 00:00

<지난 시간에 이어 김진호 목사님의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두 번째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의 연재를 허락해 주신 김진호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선교사들의 절대 다수는 미국인

구한말과 식민지시대에 개신교는 선교사들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동이 급속하던 시절에 가족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호하거나 신분 상승을 위한 근대적 자산을 획득하는 데 보다 유리한 조건을 얻고자 하는 삶의 전략으로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우산 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법’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한데 선교사들의 절대다수가 미국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개신교는 출발부터 미국 기독교에 대한 의존성이 매우 높은 집단이었다. 특히 전체 선교사들의 과반수에 달하는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은 본국 교회보다 훨씬 전투적인 근본주의적 경향을 띠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 묘지의 모습

강인철은 이들의 신앙관을 ‘종교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한다.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연맹의 총무였던 스토롱(J. Strong) 목사는 그러한 미국적 선교의 과제를 전 인류의 ‘앵글로색슨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교가 신앙적 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인종주의적 동일화’가 수반되어 있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적 동일화 담론에는 ‘인종적 타자화’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포교를 통해 신성한 인종으로 가상적인 변모

기독교 구원관 속에는 결코 신성화될 수 없는 존재의 ‘가상적 신성화’라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적 근본주의 신앙은 결코 인종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는 미개한 종족이 포교를 통해 신성한 인종으로 가상적인 변모를 가능케 한다는 확신을 수반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상적’이라는 데 있다.

   

▲ 존 해론은 1885년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하여 한국에 매장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즉 ‘동일화’는 포교의 주체(선교사)가 대상에게 주는 선물이며, 그 대상은 선교사를 자신보다 개화한 존재로 여기는 순간 ‘개화’라는 옷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이때 덧입음이라는 것은 차별화가 내재함으로써 동일화가 수행되는 것을 나타내는 수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포교 대상은 결코 닮을 수 없다는 인식 속에서 선교사를 선망하며 모방한다.

이렇게 ‘식민지적 무의식’은 선교 담론 속에 내재화되며, 그 속에는 인종주의가 작동한다. 요컨대 기독교적 구원관과 서구의 인종주의는 담론구조상 등가물이며, 미국의 근본주의 속에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인종주의적 재해석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한이 선교사들에게 위임

조선에서 미국계 선교사들의 통제는 매우 철저했다. 특히 종교 엘리트 집단인 목회자 형성 메커니즘은 철저하리만큼 선교사들에 의해 장악되어있었다. 재정은 물론이고, 교수 임용, 교과 내용, 학사 행정 등에까지 절대적인 권한이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어있는 형편이었다.

선교사들보다 더욱 선교사적인, 아니 보다 더 완고한 신앙을 대표한 박형룡은 1930년대에 "신학지남"(평양신학교 신학논문집)에 기고된 김재준의 논문들을 사상 검진하면서 그의 주장에 이른바 자유주의적 색채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즉 용이주도하게 숨겨야 했던 것)은 선교사들의 사상통제가 그만큼 심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게다가 종교재판을 통해 담론상의 이질적인 것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조선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장악력은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선교사들을 모방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주체 중심적인 교회구조는 내부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식민지적 무의식은 피선교국 엘리트들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선교사들을 모방하게끔 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순수한 동일시’를 열망하게 한다. 이 점에서 메이천파들의 정결주의는 가히 편집증적이다.

이른바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 ‘아빙돈 성경 주석 사건’ 등 근대 신학적 시선으로 볼 때는 논란할 가치도 없는 것들을 정죄하고 추방하는 사건의 주역은 메이천파 조선 엘리트들이었으며, 또 교회에서 여권(女權) 문제 같은 근대적 상식 또한 치리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도 바로 이들의 광적인 복고적 순수주의에 대한 선망과 모방의 산물이었다.

조선 기독교의 메이천 파 수장인 박형룡은, 당시 메이천 파의 본거지였던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 세미너리에서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던 근대비평 방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신에 의해 근대주의적 신학을 수용했다는 혐의를 받는 이들을 가차 없이 정죄했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모방 행위는 이와 같이 모방 대상을 과도하게 흉내내게 마련이며, 더욱 전투적인 성향을 드러낼수록 선교사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이런 사정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지속적으로 협력해왔던 선교사 중심적인 조선 주류기독교가 신사참배 건으로 당국과 불화하고 선교사들이 추방되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선교사 중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태도가 별반 변화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상처의 트라우마는 기억 상실을 낳는다!

‘신사 참배’는 근본주의 일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기독교에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시선에서 신사 참배란 논란의 여지없이 종교적 정결에 치명적인 흠집을 내는 것이었다. 전시동원체제로 치닫던 1930년대 후반 정세에서 식민지 당국과 조선 기독교는 서로 막다른 길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물적으로나 심성적으로 의존해왔던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되고, 적지 않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실형에 처해졌다. 투옥된 70여 명 가운데 20여 명만이 감옥문을 살아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니, 그들이 겪은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은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대다수 기도교도들의 상처였다. 근본주의적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지만, 대다수는 자기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것을 허용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은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상처였다. 오직 말할 수 있는 자는 목숨을 각오하고 저항한 이들뿐이다. 근본주의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타협한 자들에게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제공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언어를 빼앗긴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으며, 트라우마는 기억의 상실을 낳는다.

고통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의 언어인 망각은 고통을 다른 것으로 치환함으로써 새로운 기억의 구성에 개입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고통중독성 병증으로 나타나고야 말 것이다. 한데 문제는 트라우마에 의한 치환된 기억은 많은 경우 ‘적을 생산’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해소한다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에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서 바로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심성사적 배경이 된다.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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