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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선적 민중>은 누구인가?가장 우선적이고 가능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일궈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삶
정강길 | 승인 2005.07.26 00:00

<우선적 민중>이란?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새롭게 정립한 민중론은 곧 '인간론'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기존의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서 이해하는데, '일반인'과 '자각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인류의 역사를 <맹목적 충동>과 <자각된 열망>과의 상호 대립의 역사로 본 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진보>란 후자가 전자를 압도할 경우에만 일어날 뿐이다.

이때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는 중생을 깨우치려는 자각인이 그 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삶을 투신하려는 대상을 나는 <우선적 민중>preferential-minjung이라고 부른다. 나 자신이 보는 <민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우선성>preference을 가진다는 점에 그 커다란 특징이 있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민중이 신으로부터 우선적 특혜로서의 우선권을 가진다는 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계 안에는 저마다 경험하는 고통의 정도가 남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선 가장 절박한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역사하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의 고통이 하나님 자신의 고통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한 아픔에 있어서 결코 무심한 도덕적 군주자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민중의 <우선성>은 기존 제3세계 신학에서 곧잘 말하는 <당파성> 개념과도 흡사하며, 단지 기존의 민중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 <우선적 민중>으로서 명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자각인은 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들의 고통을 그 자신의 고통으로 전환할 줄 아는 이들이다. 고로 <우선적 민중>이란 자각인이 되지 않고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지점의 자들에 속한다. 부자는 자기 집 문 앞의 나사로가 그 자신에게 맡겨진 우선적 민중인 것을 죽기까지 알지 못하고 죽을 따름이다.

자각인의 다양한 삶 만큼이나 다양한 우선적 민중

이러한 우선적 민중의 양태는 자각인의 삶의 양태가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하다. 자각인들은 그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와 달란트에 따라서 저마다의 우선적 민중을 만난다. 예컨대, 전태일에게 있어서의 우선적 민중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이 자리하지 농민, 장애인들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김해성 목사님의 우선적 민중은 우선적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하지 다른 이들이 우선적인 민중으로서 자리하진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각인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얘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떻든 그 자신이 처한 익숙한 삶의 환경과 여건에 따라 부딪히며 교류하는 저마다의 우선적 민중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분명히 인지했으면 하길 바란다.

언젠가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어떤 분은 그럼 '직업이 교수인 사람들의 우선적 민중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하신 바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가르치는 학생들일 것이며, 또한 글로써 상대하는 일반 대중들일 것이라고 답변드렸다. 지식인의 직분이란 그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그만큼 엄중하고 무거운 것이다. 물론 목사나 교사의 직분도 위와 마찬가지로 엄중하고 무겁다.

   
어쨌든 자각인의 다양한 삶 만큼이나 세계 안의 우선적 민중 또한 매우 다양하고 천차만별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몇 가지들을 열거해본다면, 여기에는 학교 앞 안전시설의 미비로 인해 노출된 어린이들, 잘못된 교육체제로 인해 눌려 있는 청소년들, 악덕 건물주로 인해 고통 받는 세입자들, 의료보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특수질환 환자들, 사회와 자녀들에게서까지 버림받는 노인들 등등

세계 안의 억압과 고통의 경로가 다양한 만큼이나 여러 부류의 사회적 왕따들이 <우선적 민중>에 해당할 수가 있다. 혹은 멸종 위기에 놓인 동식물이 자각인의 <우선적 생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예컨대 특수질환 환자가 자각인이 됐을 경우, 그는 그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처한 고통과 아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기에 그 자신의 남은 삶을 이들을 위해 투신할 확률이 높다.

자각인이라면 전체 우주 안에서 그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가 있음을 깨달을 것이라고 본다. 무릇 저마다의 생명은 우주로부터 나왔으며 다시 우주로 돌아가리라. 그러한 전체 우주에서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를 깨닫고 우리는 우리 안의 달란트를 유용하게 써야 할 데를 발견할 때 빛과 소금이 되는 진정한 삶의 희열과 기쁨을 맛보지 않을까 싶다.

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다. "깨달은 각자(覺者=자각인)는 짐짓 윤회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이것 역시 자각인이 고통 중에 있는 우선적 생명들을 위해 그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네 삶의 전(全)영역에서 들풀처럼 강물처럼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종국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내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내가 만나야 할 우선적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물음들은 결코 이분화 되어 있지 않다.

   
지금 나의 자리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돌아보자. 내가 처한 삶의 여건, 나의 달란트 이 모두를 고려했을 때, 오늘날 나 자신에게 맡겨진 우선적 민중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말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우선적 사명들이 우선적 단계로 해결될 때, 불합리한 이 세계는 저 평등의 하나님 나라에 한 발짝씩 점점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본다. 내 삶의 전인적 지평에, 다양한 우리네 사회적 삶의 전반적 지평에, 하나님 나라가 들풀처럼 강물처럼 일어났으면 한다.

김규항은 그 자신의 글에서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하는 판사, 운동하는 국회의원, 운동하는 배우, 운동하는 코미디언, 운동하는 투수, 운동하는 장군, 운동하는 사장…. 세상의 모든 지점에 운동이 스며들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것이다."

오직 그 나라.. 속히 임하소서..
아멘..

정강길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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