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는 12지(支)의 열두 번째 동물로, 시간과 방향을 지키는 시간신(時間神)이자 방위신(方位神)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는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등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새끼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오늘날 소, 말, 개 등에 대등한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고어의 ‘톹’은 어미돼지이고, ‘도야지’나 ‘돼지’ 새끼돼지이다. 이후 ‘톹’이 사어가 되면서 ‘돼지’가 ‘톹’ 대신 표준어가 되고, ‘도야지’는 방언이 되었다.

이는 윷가락의 호칭 "도"는 豚(돈), "개"는 犬(견), "걸"은 羊(양), "윷"은 소(牛우), "모"는 말(馬마) 등 가운데 ‘도’는 고유어인 톹으로서 어간 일부의 탈락형이라 할 수 있는데, 아직도 돼지고기를 ‘톹고기’ 라고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 돼지를 뜻하는 한자로는 猪(저), 豕(시), 豚(돈), 亥(해),  猳(가), 獜(린), 豵(종) 등이 있다.

돼지는 동작이 느리고 음식 욕심이 많은 까닭에 욕심 많고 우둔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반면에 복, 횡재, 승진, 소식 등을 가져다 주는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일까? 사람들은 돼지꿈을 꾸면 이틑날 복권을 구입한다. 반드시 당첨된다는 보장은 없으나 돼지가 복을 상징한다고 믿어온 속신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또한 꿈에 돼지가 신음하거나 죽으면 흉하고, 임산부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피부가 거칠어지거나 부스럼이 많다는 속신도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발소, 음식점, 일반 상점에 들어가면 어미돼지가 여러마리의 새끼들에게 젖이 물리고 있는 그림액자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는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의미였음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것이다. 돼지는 다산의 상징을 대표하는 동물로, 정월의 첫 돼지날에 개업하면 부자가 된다는 속신도 이에 연유할 것이다.

돼지의 영이성(靈異性)에 관련된 기록이 처음 역사에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 초기에서부터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봄 ․ 가을에 하늘과 땅에 올리는 제사인 교사(郊祀)에, 희생동물로 돼지를 바쳤고, 그 교시(郊豕; 국가 제사용 돼지) 덕택에 비옥한 도시를 얻었고, 왕이 자식이 없을 때 왕자를 낳을 후궁을 알려주어 대를 잇게 하는 신통력과 고려 작제건(作帝建)은 돼지의 도움으로 송악 남쪽에 터를 마련하게 되고 후삼국을 통일한 손자 왕건이 태어났다. 10월 상달의 고사나 굿에는 반드시 돼지머리를 올리고 복을 빌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의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라) 설화는 비처왕(毗處王)이 목숨을 연명하는 일에 돼지의 공로가 인정되었고, '사람이 돼지로 변했다(人化猪)’는 김류(金瑬; 1571~1648)의 족인(族人) 이야기, 금돼지가 아름다운 여인을 납치하여 통정 후 낳은 아이가 바로 최치원이라는 설화 등은 모두 돼지가 신통력 있는 길잡이 예언자임을 상징하고 있다. 

희생물로서의 돼지머리는 인간의 바람을 천신에게 알려주는 일종의 의사소통의 수단인 셈이다.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유명해진 고구려의 온달장군도 해마다 3월 3일 낙랑의 산에서 사냥 이후 돼지와 사슴을 산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이런 제천의식에 쓰이는 교시(郊豕)는 하늘의 뜻을 아는 동물로 여기게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늘에 고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놓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궁궐이나 사찰의 추녀마루에 돼지의 형상인 저팔계(豬八戒) 잡상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재앙이나 악귀를 쫓기위한 것이며,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등은 궁궐과 사찰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돼지의 민간요법으로 침흘릴 나이가 지났는데도 침을 흘리면 돼지 코를 부적처럼 목에 걸고 다닌다거나 산모가 젖이 안나오면 족발을 삶아 먹으면 젖이 많이 나온다. 돼지 똥은 병을 가져다 주는 역신을 쫓아낼 수 있는 축귀 능력이 있다거나 곶감을 먹고 체했을 경우에는 돼지고기를 먹이면 효험이 있다고 했다. 예로부터 돼지가 입에 지푸라기를 물고 우리 안을 뛰어다니면 이내 폭풍우나 강풍이 다가온다는 징조였다.

고대 이집트나 로마에서 돼지는 신이나 달에게 제물로 바쳐진 동물로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진 반면에 불결한 동물로 그려지는 모순적 양가성을 지닌 동물이다. 무슬림이나 유대인들이 우리네 민족과는 유난히 돼지나 돼지고기를 혐오하거나 먹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돼지가 ‘더러움’의 상징어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 근거한 것일까?

돼지가 ‘더러운’ 동물로 인식된 것은 고대 중동지역의 생태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돼지는 물이나 숲이 부족한 중동의 기후와 생태에 잘 견딜 수 없는 체질을 가지고 있고, 잡식성인 돼지의 먹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한 점에서 돼지가 사육되기에는 부적함이 있다. 돼지는 소나 말처럼 사람들의 운송 수단이나 경작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돼지를 신성시하는 이방의 이질적인 정서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반감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구약성서 이사야 65장 4절~5절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더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라는 구절과 이사야 66장 17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구절은 비밀리에 돼지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구약성서 레위기 11장 7절~8절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는 구절에서 돼지는 ‘부정하다’는 평판을 영속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다.

구약성서 잠언 11장 22절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한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는 구절은 돼지의 외적 더러움을 인간 내면의 추함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약성서 베드로후서 2장 22절 “참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는 구절은 과거의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는 부정적인 인간상을 그려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돼지우리는 ‘더러움’의 상징으로 둔갑되어 있다. 기실 돼지는 목욕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인간들이 지저분한 돼지우리를 제때 치우지 않기 때문에 돼지가 지저분한 곳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동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사람 탓에 졸지에 지저분한 동물로 전락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희노애락을 같이한 돼지의 좋은 미풍양속의 상징성이 유대인들에게는 죄와 불결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은 흥미를 유발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돼지를 성스럽거나 비루한 동물로 보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나 조물주가 만든 돼지를 지저분하거나 사악함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것은 또다른 인간의 악령을 낳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집에서 소, 말, 개, 닭,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주인이 기르던 짐승을 모아 놓고 기력이 없어 보양을 하겠다고 하자. 소는 밭갈이, 말은 짐수레 운반, 개는 집 지킴이, 닭은 새벽의 공(功)을 주인께 각자 고하자 주인이 어찌하지 못했다. 다만 돼지는 자기의 공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눈물지으며 주인님 “저를 잡아 드시옵소서” 라고 했다는 우리네 일화가 있다. 돼지의 공에 생각해볼 일이다.        
 

홍성남(한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외래교수/ 고전산문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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